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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점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를 읽고 — 리더십에 관하여

핵심 요약

샌프란시스코 49ers를 슈퍼볼 3회 우승으로 이끈 빌 월시의 리더십 책 독서 후기. 점수를 쫓지 않는 방식으로 점수를 만든 그의 '성과 기준(Standard of Performance)', 좋은 재능과 나쁜 태도의 등식, 가르침이 곧 리더십의 정의라는 선언, 그리고 책 후반부의 자기 고백까지. 리더십 원칙 요약이 아니라, 그 원칙 앞에서 계속 걸려 넘어진 한 사람의 기록.

점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The Score Takes Care of Itself) — Bill Walsh

들어가며

조직 얘기, 리더십 얘기를 하게 될 때마다 다들 내게 어떤 성공 경험이 있기에 이렇게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참 민망한 질문인 것이, 나는 리더십에서 그 어떠한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내가 있는 조직에서 외톨이였고, 내가 직접 사업을 했던 시절부터 최근 조직까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팀에 속한 느낌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릴 땐 “나는 다르다”라는 자만과 착각이었다면, 최근엔 결국 타인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내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내가 세운 기준과 원칙, 그리고 일관성이 무너지며 아래로도 위로도 모래성과 같은 내 리더십이 어떻게 무너지는지까지 두 눈 뜨고 지켜보았다. (불가항력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그 팀을 선택한 건 결국 나니까.)

그나마 위안인 건, 내 커리어에서 겪은 모든 사람들 중 — 나를 포함해서, 역대 내 상사, 내 후임 모두 포함해서 —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오히려 내 기준에서 그들은 최악에 가까웠고, 웃기게도 나는 최소한 그들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리더는 소속된 팀원들에게 적재적소의 위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나이브하게 위임하는 건 팀을 방임주의로 가져오는 것이고, 실패한 팀원들을 위로하면서 만드는 ‘가짜’ 심리적 안정감은 그저 그들이 나와 일하며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없이 못난 내 개인의 이기심에 불과하다. 반대로 그들을 믿지 못해 내가 직접 모든 일을 끌고 가면, 결국 팀원들은 본인의 역할 플레이를 찾지 못하고 알맞은 성장과 도전을 하지 못하며, 근무시간만 챙기면 나머지는 리더가 책임지겠지라는 방만함에 빠진다. 팀의 승리는 더 이상 그들의 책임이 아니고 관심도 없다. 그들은 회사가 망하지 않고 월급만 주길 바랄 뿐이다. 위임을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팀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정도를 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렇기에 어디에서나 일관성있게 통하는 리더십 법칙 같은 건 없다.

과거에 나는 좋은 팀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심리적 안정감’은 왜 중요한가, (3개월 전쯤 썼던 “승리하지 못하는 조직에게 미래는 없다”에서도 썼듯) 승리하는 팀이 왜 중요한가 — 이런 온갖 리더십과 팀워크에 대한 책을 탐독하다가, 어느 순간 책을 통해서 무언가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편의주의적이고 게으른 생각인지를 깨닫고 관련된 책 읽기를 모두 내려놓았다. 독서는 가끔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배움과 깨달음, 경험을 주지만 리더십에 한해서 만큼은 다음과 같이 감히 말할 수 있다.

책을 덮고, 그 시간에 차라리 지금 팀원들과 1 on 1을 하라. 그리고 내가 하는 활동들이 정말 팀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꺼내는 리더십 조각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디테일을 놓칠 때, 위로 향하는 리더십과 정렬이 되지 않을 때, 팀원들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할 때, 승리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할 때 — 성공한 리더십보다는 밤잠 설치며 온몸으로 느꼈던 뼈저린 실패의 연속에서 만들어진 무엇인가다.

그래서 이 글은, 빌 월시의 원칙 요약이 아니다. 내가 여전히 실패하고 있는 지점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책이 거울처럼 비춰준 내 실패들을 하나씩 마주한 후기에 가깝다.

빌 월시(Bill Walsh, 1931~2007)는 풋볼계의 레전드이며, 스포츠 드라마의 뻔한 클리셰(허접한 팀에 부임한 감독이 그 팀을 어떻게 최정상의 팀으로 올려두고 유지했는가)의 주인공이다. 80년대 허접한 49ers(포티나이너스)를 왕조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며, 매우 극도로 뛰어난 리더십을 보유한 명장이었다. 84, 88, 89 시즌 3번의 우승과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WCO)‘라는 전술을 처음 팀에 사용한 걸로 유명하다. NFL을 잘 모르는 내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풋볼 역사는 WCO 전후로 갈릴 정도로 역사적인 전술이라고 한다. (나는 한 번도 풋볼 게임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규칙을 몰라도 이 책을 읽는 데 전혀 문제 없다.)

나는 NFL을 잘 모르지만, 빌 월시의 리더십 책이 워낙 유명해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고이 모셔둔 책이었다. 더 이상 일부러 1 on 1 해야 하는 팀원이 없는 지금 이 시점에, 내 실패를 되돌아보며 읽어보기 좋겠다 싶어서 읽은 책이다. 어쩌면 다음 번에 올 기회에 내가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며.

이 책이 정말 좋은 책인 건, 미국 풋볼 역사상 이토록 대단한 명장이 쓴 책이니 그의 성공과 후일담,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리더십 규칙 정도로 생각하고 책에 대한 인상을 가지기 쉬운데, 이 책의 제목 「점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The Score Takes Care of Itself)」는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리더십 원칙이자, 결국은 끝까지 지키지 못한 그의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킥은 후반부에 있다. 전반부에서 그의 리더십 원칙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밑줄을 긋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면 책의 성격이 통째로 달라진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달라지는지는, 본론의 마지막 섹션에서 풀어내려 한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분야의 리더이지만 그의 성공적인 리더십 뒤에 느껴지는 고단함, 고독함, 피로함, 적나라한 그의 실수와 실패들 덕분에 오히려 그가 앞서 제시한 여러 리더십 원칙들이 더 와닿게 되었다. 그래서 이 후기는, 그의 원칙을 정리한 요약본이 아니라 그 원칙 앞에서 계속 걸려 넘어지고 있는 한 사람의 기록이 되었다.


점수는 저절로? — 승리는 여전히 평가 기준이다

「점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The Score Takes Care of Itself)」. 처음 제목을 봤을 때 나는 살짝 경계했다. 3개월 전쯤, 나는 블로그에 “승리하지 못하는 조직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을 썼다. “Winning solves everything.” 승리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그 문장을 북극성 삼아, 조직에 승리를 정의하지 못한 리더는 결국 무너진다고 꽤 단호하게 적었다. 그런데 빌 월시는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리를 쫓지 마라. 점수는 알아서 따라온다. 샌프란시스코 49ers를 슈퍼볼 세 번 우승으로 끌어올린 전설적인 코치가 하는 말이니 내 말이 틀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결론부터 쓰면, 아니다. 빌 월시와 나는 같은 지점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었다. 책을 덮을 때쯤 그게 선명해졌다.

빌 월시는 “최고 지침은 승리가 아니었다(The Prime Directive Was Not Victory)”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신에 있었던 것은 포괄적인 기준과 계획—숙련도, 즉 역량의 수준을 설치하여 필드 안팎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생산 수준이 상대방보다 높아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너머에서 나는 점수가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 “최고 지침은 승리가 아니었다 (The Prime Directive Was Not Victory)” 장

그리고 같은 장에서 조금 더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나는 우리의 초점을 승리라는 상(prize) 보다는 개선의 과정에 맞추었다—어쩌면 우리의 실행 품질과 사고의 내용, 즉 우리의 행동과 태도에 집착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하면 승리가 알아서 따라올 것이고, 따라오지 않을 때는 수행 기준을 높일 방법을 찾을 것임을 알았다. 적어도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 같은 장

여기서 내가 멈춰 섰던 건 “적어도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라는 마지막 한 줄이었다. 빌 월시는 승리를 치워둔 게 아니다. 승리를 노골적으로 쫓지 않는 방식 으로 승리를 쫓았을 뿐이다. 그는 기준과 과정에 집착했고, 그 집착이 작동하지 않으면 수행 기준을 다시 높일 방법 을 찾겠다고 말한다. 즉, 그의 과정도 결국 ‘승리했는가, 못 했는가’로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승리를 최우선으로 두었다고 해서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과정에서의 원칙들은 결국 “승리”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평가받지 않는 기준은 취미고, 평가받지 않는 과정은 자기 위안이다. 빌 월시가 숙련도에 그렇게 집착할 수 있었던 건, 풋볼이라는 세계가 매 일요일마다 점수판에 명확한 숫자를 찍어주기 때문이다. 매 경기 승패가 나오니까, 그는 승리를 입 밖에 꺼내지 않고도 승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런데 비즈니스는 그렇지가 않다.

일반적인 비즈니스 조직에서 ‘승리’를 팀 전체에 정렬하는 작업은, 솔직히 풋볼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다. 우리는 매주 점수판을 받지 않는다. 우리의 “승리”는 분기 지표일 수도, 프로덕트 지표일 수도, 때로는 3년 뒤에야 판가름 나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과정에만 집중하라고 놔두면, 그 과정이 정말 승리로 향하는 과정인지 아무도 묻지 않게 된다. 각자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방향이 제각각이라던가. (이걸 3개월 전 글에서 “승리를 정의하지 못한 조직”이라고 쓴 거다.)

그러니까 비즈니스 조직에서는 여전히 ‘승리’가 평가되는 것이 중요하다. 빌 월시처럼 과정에 집착하더라도, 그 과정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리더가 책임지고 정렬 해야 한다. 그게 안 되는 조직에서 “점수는 저절로 따라와요”라고 말하는 건, 내가 보기엔 그냥 책임 회피에 가깝다.

결국 빌 월시의 문장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승리를 포기하라가 아니라, 승리로 향하는 매일의 기준을 포기하지 말라.

그는 “나 자신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법(How I Avoid Becoming a Victim of Myself)” 장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다른 각도로 반복한다.

“상황에 상관없이 최고 수준에서 압박 속에 수행하는 핵심은, 행동 기준의 맥락 안에서의 준비, 그리고 당신의 리더십 철학에 담긴 행동과 태도를 조직이 철저히 체화하는 것이다.”

— “나 자신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법 (How I Avoid Becoming a Victim of Myself)” 장

나는 “승리를 정의조차 하지 못한 조직은 무너진다” 였고, 빌 월시는 그 정의된 승리 위에서 매일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책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행동 기준”과 “조직의 체화”를 말할 때, 나는 정작 그 기준을 조직에 체화시키는 데 몇 번을 실패했는지 셀 수 없었다.


좋은 재능, 나쁜 태도 — 더 일찍 쳐냈어야 했다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팀의 기준에 맞지 않는 태도로 들어왔을 때.

빌 월시는 이 문장을 괄호 안에 던져 놓는다.

“당신의 구체적인 직무가 무엇이든 간에,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든 다양한 측면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팀에 필수적이다 (즉, 좋은 재능 + 나쁜 태도 = 나쁜 재능).” — “성과 기준 (Standard of Performance)” 장

괄호 안이 더 크게 울렸다. 책을 덮고 한참을 멈춰 있었던 구절 중 하나다.

솔직히 나는 이 문장을 빌 월시보다 한참 늦게 배웠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계속 쌓아나가지만, 팀원들과의 협업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형편없는 사람들을 여럿 겪었다. 한때는 그들의 재능에 매몰되어 그래도 그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빼면 이 파트가 무너진다, 지금 당장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 이런 변명을 나 스스로에게 계속 했다. 기준을 흐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다른 팀원들에게 “원래 저런 사람이야”라고 설명하고 다녔다.

지금은 확신한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좋은 태도를 가지고 같은 사이드에서 정렬되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시라도 일찍 팀에서 쳐내야 한다.

빌 월시는 이 부분에서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다.

“다양한 면에서 기준에 미달하는 개인은 대개 조용히 제거되었고,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 “최고 지침은 승리가 아니었다” 장

“조용히 제거”. 드라마처럼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거나 공개적으로 선을 긋는 장면이 아니다. 그냥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보낸다. 빌을 옆에서 본 사람의 기록은 더 분명하다.

“빌은 충분히 영리했고 충분히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재능 있는 사람이라 해도 부정적인 조직 문화에 기여하는 사람(팀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이라면 내보냈다.” — “문제 해결사” 장

내보낸 것 자체가 선택이 아니라, 재능을 이유로 남겨두지 않은 것 이 선택이었다.

인상적인 문장은 따로 있었다. “인격을 찾아라, 캐릭터들을 조심하라(Seek Character. Beware Characters.)” 장에서 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대목이다.

“나는 그의 재능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보다 더 오래 이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의 플레이는, 마음을 다잡았다면 가능했을 수준에 한참 못 미쳤다.”

빌도 그랬다. 4번의 슈퍼볼 트로피와 명예의 전당을 가진 그 사람도, 재능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보다 더 오래” 끌고 갔다. 그리고 그걸 후회로 기록해두었다. 한 줄로. 나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나 역시 감당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재능이라는 이유로 감당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팀이 뒤집어썼다.

그리고 빌은 이 주제를 “Big Ego” 장에서 한 번 더 못 박는다.

“거만한 이기주의자가 조직에 끼치는 해악은 언제나 그가 주는 이점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always). 빌이 이런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더 무겁다. 이점이 해악을 이길 수도 있다가 아니고, 이점이 해악을 이기는 경우가 가끔 있다도 아니다. 언제나 해악이 이긴다.

결국 내가 매몰되었던 건 재능이 아니라, 재능을 놓치는 두려움이었다. 이 사람이 빠지면 안 된다는 불안이 기준을 계속 타협시켰다. 그 타협의 비용은 다른 팀원들이 치렀다. 태도가 나쁜 재능이 팀에 남아있는 동안, 그 팀의 “태도의 기준”은 그 사람이 정한다.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가 과한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게 내가 뒤늦게 본 장면이다.

한시라도 일찍 쳐내야 한다. 이게 지금의 내 확신이다.


가르침이 리더십의 정의다 — 그런데 나는 인내심이 없다

빌 월시는 책의 제일 중요한 자리에서 이렇게 못 박는다.

“리더십이란, 그것이 최상일 때, 정확히 이것이다. 조직에 속한 개인들에게 기술, 태도, 목표를(그렇다, 목표는 정의되기도 하고 가르쳐지기도 한다) 가르치는 것이다. 삶의 대부분—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교육하는 것, 회사나 영업팀을 운영하는 것, 선수를 코칭하는 것—은 훌륭한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 “가르침이 당신의 리더십을 정의한다” 장

리더십의 기술 이 아니라, 리더십의 정의 가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전략도, 비전 제시도, 의사결정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

빌은 가르침을 조직의 최우선 과제라 부른다.

“슈퍼볼 우승(또는 시장 1위 달성, 의미 있는 분기별 생산 목표 달성, 대형 계약 수주)은 팀 전체가 각자의 일을 해낼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전체 성공에 기여한다고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 — “최우선 과제는 가르치는 것이다(The Top Priority Is Teaching)” 장

“그리고 ‘성공은 모두의 것’이라는 이 조직적 인식은 리더가 가르치는 것이다.” — 같은 장

“실패도 모두의 것이다. 당신이나 팀원 중 누군가가 ‘공을 떨어뜨리면’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 같은 장

그는 은퇴할 무렵 자기 인생을 이렇게 정리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끌어낼 교훈은 이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지 마라. 나는 사랑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깊이 파고드는 방법, 위대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 “가르치는 일의 짜릿함(The Thrill of Teaching)” 장

사랑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니.

나는 내가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고 오래 믿어왔다. 신입이나 주니어가 팀에 들어오면 그들을 끌고 가기 위해 스터디를 직접 조직했고, 필요하면 내가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온보딩도, 코드 리뷰도, 1 on 1도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항상 좋은 코치,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속도 였다. 내가 가르친 게 실제 업무에 반영되기까지는 각자의 속도가 다 달랐고, 나는 그 속도차를 충분히 견디지 못했다. 설명했는데 두 번째 리뷰에서 같은 문제가 또 보이면 속이 탔다. 세 번째엔 내 말투에서 티가 났다. 네 번째쯤엔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빠르다는 결론으로 도망쳤다.

항상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가르침을 좋아한 것과 가르침에 충분한 인내심을 쏟은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는 걸, 꽤 오래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뼈아픈 건 신입/주니어 쪽이 아니다. 두 번째 실패는 시니어들에게 있었다.

시니어에겐 내가 가르칠 게 없다고 단정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알아서 한다, 내가 그들의 의지를 보장해줘야 한다, 주도적으로 만들어야 그들도 성장한다 — 이런 여러 판단이 겹쳐서 나는 그들을 사실상 방치 했다. 그걸 나는 오랫동안 자율 이라 불렀다.

가르침이 꼭 기술적인 영역에만 머물 필요는 없었다. 일의 방향, 조직의 원칙, 의사결정의 기준, 커뮤니케이션의 태도 — 이런 건 시니어에게도 충분히 전할 수 있었고, 오히려 시니어일수록 내가 챙겨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나는 “알아서 하겠지”로 퉁쳤다.

어떤 면에서 그건 좋은 결정이기도 했다. 그들은 주도적으로 많은 걸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정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이미 결정이 된 뒤 에, 내 스스로 내 입지를 줄이는 일을 자초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방치는 자율이 아니었다. 방치는 그냥 내가 가르침이라는 노동을 회피한 것이었다.

빌 월시는 이렇게 쓴다.

“350파운드짜리 태클이든, 직원이든, 아이든, 우리는 격려하고, 지지하고, 영감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궁극적으로—사람들은 스스로 해야 한다.” — “의지력은 이식할 수 없다(The Bubba Diet)” 장

이 문장은 내 방치를 변호해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빌은 “의지력은 이식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까지 격려하고 지지하고 영감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전제를 깔아둔다. 그 최선을 다 한 다음에야 “결국은 스스로”가 유효해진다. 나는 그 전제 부분을 건너뛰고 결론만 가져다 썼다. 변명으로.

그리고 빌은 한 번 더 못 박는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 — “멘토를 해방시켜라(Unleash Mentors)” 장

이것이 리더가 멘토들에게 요구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그 출발점은 결국 리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조지와의 멘토링, 엘리와의 협업에서 나는 여전히 인내심이 부족하다. 내 머릿속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이미 몇 단계 앞서 달려 있고, 그걸 따라오지 못하는 상대에게 답답해하는 내 모습이 종종 보인다. 한 번 설명하고 “아, 됐다”고 넘어가고 싶어한다. 상대가 다시 물으면 내 어조가 약간 날카로워지는 걸 스스로 느낀다.

어쩌면 이건 내가 다시 제품을 직접 개발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손을 다시 움직이는 사람은 머리가 빨라지고, 빨라진 머리는 옆 사람의 속도를 무시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이유일 뿐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매니저로서 리더십을 챙겨가던 시절보다 더 퇴보한 부분들도 보인다.

리더를 내려놓으면 사람으로서는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실은 반대쪽으로 간 부분이 있었다. 매니저라는 위치가 강제로 나에게 씌워주던 인내심이라는 겉옷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옷을 벗고 나니, 벗은 채의 내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는 게 드러났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한다.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더 잘 전달할지를 고민하고 다듬어야 한다. 가르침은 상대가 받아야 완성되는 게 아니라, 내가 충분히 건넬 때까지 내 몫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면의 목소리 — 내 블랙 코미디가 심은 것

리더십 책에서 읽은 문장 중 가장 섬뜩 했던 건 이거였다.

“직원들이 실제 업무에 가지고 들어가는 진정한 영감, 전문성, 실행 능력은 대개 외부의 목소리가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가 말하는 것의 결과다. 리더의 격려 연설이 아닌 것이다. 팀원들에게 있어, 그들 내면의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리더인 당신이 결정한다. 리더는, 적어도 좋은 리더는, 팀이 자신에게 어떻게 말을 거는지를 가르친다. 효과적인 리더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무엇을 말할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 “내면의 목소리 대 외면의 목소리(The Inner Voice vs. the Outer Voice)” 장

격려 연설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 외부에서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팀원이 혼자 앉아 있을 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그게 리더가 심는 것이다. 빌 월시는 그 앞 페이지에서 이렇게도 적었다.

“리더십은 전문성이다. 수사학도 아니고 응원 연설도 아니다. 사람들은 신뢰성과 전문성—직업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을 따른다.” — 같은 장

그리고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피드백을 줄 때, 나는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초점을 맞췄고, 지난 며칠이나 몇 주간의 형편없는 플레이를 끌어들여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 “언어의 레버리지” 장

비판할 때조차 과거를 끌어오지 않았다는 말.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말. 빌 월시는 자신의 말이 팀원들의 어깨에 얹혀서 며칠, 몇 주를 같이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 페이지에서 이유까지 친절하게 적어두었다.

“항상 지적하고 비판하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비춰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냥 무시당하게 된다. 가르치고 영향을 미치며 발전을 이끌 능력이 줄어들다가 결국 사라진다.” — 같은 장

이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초반에 다른 팀과 협업할 때, 스타트업스럽지 않은 다른 팀의 대응과 허접한 소통 방식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곤 했다.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이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도, 팀원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했다. 그런 행동이 유머와 팀원들에 대한 공감으로 읽히길 바랐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게 결론이다. 나의 말투가 팀원들의 행동에서 그대로 비치는 게 보였을 때 그제야 그만두려 했지만,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의 (자칭) 블랙 코미디는 뼈저리게 좌절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더라도 거기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희망에 기반한 것들이었는데, 딱히 그 의도가 전달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달되지 못한 것 까지가 어쩌면 블랙 코미디의 완성(..))

솔직히, 내 안에는 그때도 분명 신념 같은 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나은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이 뻔한 현실 위에서도 뭔가 다르게 해볼 수 있다는 희망. 그런데 입 밖으로 나간 건 신념의 모양이 아니었다.

흘려보난 건 신념이 아니라 냉소였단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냉소는 희망보다 훨씬 더 전염성이 강한 언어가 아닌가. 내가 그러한 말과 행동을 그만두려 했을 때, 그 말들은 이미 팀원들의 입과 메신저와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비우러 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나의 의도가 아니라 나의 말투였다. 리더의 말이 팀원의 내면 목소리가 된다는 빌 월시의 문장은, 이 지점에서 나를 아프게 했다.

여기에 하나 더 얹혀 있는 기억이 있다. 하위 20퍼센트에 대한 이야기다.

오랜 경력을 가진 팀에 프로 ‘불평’러(..)가 있었는데, 그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더 강하게 얘기하지 못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1 on 1을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위에서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하게 되고,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가 그렇게 이미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기를 망설일수록, 그 갭(나의 긍정과 그들의 부정)은 더욱더 커지며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 월시는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짚어두었다.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로, 하위 20퍼센트의 불평은 종종 나머지 80퍼센트의 긍정적인 열정을 압도한다. 나는 항상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징징대는 자들이 불균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하위 20퍼센트가 당신의 성공을 결정할 수 있다(The Bottom 20 Percent May Determine Your Success)” 장

나는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을 피했다. 그 사람이 뱉는 말이 회의에서 공기를 얼마나 무겁게 만드는지 알면서도, “저 사람만 저렇지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부정적인 신호를 듣기 시작하면 내 긍정까지 흔들릴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미뤄둔 사이, 그의 냉소는 조용히 팀의 공용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빌 월시는 이렇게도 적었다.

“조직 내 이 요소—특수 역할이나 보조 역할을 하는 ‘하위 20퍼센트’—를 무시하는 리더는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잉여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할 때, 그들의 불만은 마치 암이 몸 전체로 퍼지듯 조직 전체로 퍼질 수 있다.” — 같은 장

암처럼 퍼진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조금 전까지 반성하던 내 공개 비난의 장면과, 그 불만분자의 얼굴이 하나의 그림 위에 포개지는 걸 봤다. 내가 위에서 뿌린 냉소와, 아래에서 방치한 냉소가 같은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리더의 언어는 한 방향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서 내면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불만을 제때 마주하지 못하면 같은 색의 목소리로 번져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건 결국 듣기를 망설이는 그 몇 주, 몇 달 이다. 내가 듣기 싫어서 미뤄둔 시간만큼, 갭은 벌어지고, 조직은 조용히 무너진다.


위로 향하는 리더십 — 빌이 구단주에게 한 장을 할애한 이유

리더십 책을 들추면 대부분 아래로 향하는 리더십 이야기다. 팀원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동기 부여할 것인가. 서점 한 코너를 통째로 채울 만큼 많다.

그런데 위로 향하는 리더십 은, 나는 어디서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상사, 이사회, 투자자, 구단주 —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는다. 실무자 시절엔 보스가 한 명이라 그나마 단순하지만, 중간 관리자가 되는 순간 그 관계는 내 일의 절반이 된다. 성과보다 때로 더 무거운 절반.

그래서 이 책에서 빌 월시가 구단주 에드 드바르토로 주니어(Edward J. DeBartolo Jr.)에 관해 한 장을 따로 할애해 쏟아내는 장면을 읽었을 때, 나는 좀 놀랐다. 전설적인 감독이, 은퇴 후의 회고에서, 자기에게 기회를 준 사람에 대해 “이래도 되려나”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비판을 토해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긴 비난의 끝에서 빌이 다시 돌아와 그가 준 기회에 대한 감사 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빌에게 리더십의 무대를 내어준 것도 에드였고, 그 리더십이 서서히 망가져 간 원인이 된 것도 에드였다. 같은 한 사람이, 빌의 커리어를 만들고 또 갉아먹었다. 이 이중성을 빌은 숨기지 않고 책 한가운데에 그대로 펼쳐 놓는다.

처음 감독직을 맡던 시절을 빌은 이렇게 회고한다. “자율성과 권한” 장에서.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그가 조직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스이며 그가 내 권위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렸다는 것이다. 이 권한과 지원 없이는 비참한 상황을 감안할 때 내 과업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한과 지원. 이 두 단어가 없으면 중간 관리자의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빌은 못 박는다. 그리고 한 권의 책 뒷부분으로 가면서, 그 권한과 지원이 서서히 거둬들여질 때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 바로 그 장이 에드에 대한 장이다.

빌이 이 상황을 뭐라고 부르는지 그 제목부터 처연하다. 버텨라, 도움이 올 때까지 — 상사를 계속 안고 가라.

“당장 결과를 원하는 윗사람들이 섣불리 행동하지 않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아래 사람들이 포기하거나 반기를 들지 않도록 함께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이 한 문장에 중간 관리자의 삶이 전부 들어 있다. 위는 조급하고 아래는 지쳐 있다. 그 사이에서 양쪽을 동시에 붙잡고 있어야 한다. 놓치는 순간 어느 한쪽이 무너진다.

빌의 처방은 묘하게 실무적이다.

“나는 구단주(와 그의 고문들)가 내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가족의 막대한 재정 투자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길 바랐다”

“그는 내가 감독 겸 단장으로 일하던 초기 시절에 함께 일하기 정말 훌륭한 보스였다. 이는 어느 정도, 내가 지속적으로 그를 완전히 정보 공유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그에게 안도감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구절.

“읽든 읽지 않든, 문서화된 정보—전망, 평가, 진행 보고서, 현황 업데이트—를 상사에게 쏟아부어라. 그런 다음 정기 미팅을 요청하라. 아주 전문적인 방식으로, 상사가 당신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고 있으며 그것이 문서화되어 있다는 것을—사실 그들이 손에 쥔 저 두꺼운 폴더 안에 있다는 것을—이해하도록 만들어라”

슈퍼볼을 세 번 들어 올린 감독의 조언이, 결국 상사에게 정보를 끊임없이 쏟아부어서 안도감을 심어라 는 실무 팁이다. 읽든 안 읽든 상관없다. 폴더가 두툼하게 손에 쥐어져 있다는 감각, 그것이 위를 진정시킨다. 처음엔 너무 실무적이라 웃음이 나올 정도였는데, 다 읽고 나선 웃을 수가 없었다. 저 문장은 빌이 경험한 가장 고단한 계절에서 건져 올린 생존 매뉴얼에 가깝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얹는다. 공에서 눈을 떼지 마라.

“지는 시기나 반전 상황에서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 사람들—보스, 이사회, 주주들—을 달래면서, 동시에 정말 중요한 것에 자신의 주의를 절대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위를 달래라. 동시에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 두 개의 명령이 한 문장 안에 태연하게 공존한다. 빌은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이게 얼마나 잔혹한 주문인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책 한 장 전체가 그 잔혹함의 기록이다.

나는 빌 월시와 구단주의 관계에서, 내가 거쳐 온 회사들을 겹쳐 읽었다. 성격은 저마다 달랐지만 구조는 비슷했다. 아래로 향하는 리더십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위로 향하는 리더십 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그 무엇보다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리더십의 기회를 열어준 사람들과 그 리더십이 망가진 이유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내 구체적인 경험을 여기에 담을 수는 없다. 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간 관리자로 일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비슷한 딜레마를 어디선가 겪고 있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위의 조급함을 흡수하고, 아래의 피로를 흡수하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자기 자신의 지침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로.


나는 들이받았는가, 포기했는가

빌 월시는 책 후반부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결과가 해고가 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일어서야 할 때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되듯이, 말하기는 쉽고 행동하기는 어렵다.” — “Zero Points for Winning(승리에 0점 주기는 곧 지고 있다는 뜻이다)” 장

빌 월시다. 슈퍼볼을 세 번 들어 올린 사람. 그런 빌조차 “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어서지 못했다”라고 고백한다.

빌은 또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이 의견은 가지고 있다.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데 대가를 받는다. 의견을 제시하는 것과 결정을 내리는 것의 차이는 리더를 위해 일하는 것과 리더가 되는 것의 차이다.” — “리더십의 공통분모: 의지의 힘” 장

“무너진다면, 올바른 이유로 무너지고 싶었다. (…) 가장 힘든 것—용서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방식이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행로 변경만이 승리로 가는 유일한 길인데도 실패하는 것이다.” — “올바른 이유로 틀려라” 장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놓이면 섬뜩해진다. 의견이 아니라 결정. 무너지더라도 올바른 이유로. 그런데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았는가.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진짜 잘되는 방법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책임질 수도 책임지고 싶지도 않은 순간들에는 항상 타협을 했다. 의견은 있었고 심지어 답도 보였는데, 결정의 자리에 앉기 싫어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건 양보가 아니라 도망이었다.

직장인이 뭐 다 그렇지, 라는 말로 허접하게 위로받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한 타협의 순간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 스스로에게 상처가 된다. 그 장면들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조용히 쌓여서 언젠가 “나는 그때 진짜 리더였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빌 월시조차 자기 자신을 위해 일어서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것뿐이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들이받았는가? 아니면, 그냥 포기했던 것인가.”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반부를 읽을 때 나는 빌 월시의 원칙들에 계속 밑줄을 그었다. 기준, 가르침, 태도, 내면의 목소리, 위로 향하는 리더십. 배울 게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다 갖췄지?” 싶었다. 그런데 책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밑줄의 성격이 달라졌다. 그가 승리한 장면이 아니라, 무너지는 장면에서 멈추게 됐다.

빌 월시는 먼저 이렇게 경고한다.

“최상위 경쟁에서 연속 우승자가 드문 이유는, 어느 정도의 성공이 찾아오면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 “패배보다 승리가 더 다루기 어렵다” 장

그리고 한 장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일이 가장 잘 풀리고 있을 때야말로 리더십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엄격하고,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강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고 있지만, 그 바람이 당신을 쓰러뜨리지 않도록 하려면 승리가 낳는 위험을 이해해야 한다.” — “반복 우승이 어려운 이유” 장

승리가 낳는 위험. 이 표현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보통 실패의 위험만 생각하는데, 빌은 거꾸로 말한다. 정말 위험한 건 일이 잘 풀릴 때라고. 그리고 이 경고는 단순히 전략적 조언이 아니었다. 그 경고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는 게, 뒤로 갈수록 분명해진다.

그가 자기 내면을 털어놓는 장이 있다. 제목이 “The Perfection of the Puzzle(퍼즐의 완성)“이다.

“40점 차이로 지고 싶지 않았다. 39점 차이로 지는 것을 선호했다. 우리가 20점 차이로 이기면, 한밤중에 깨어 어떻게 21점을 냈을 수 있었을지 열심히 생각했다.” — 같은 장

20점 차이로 이긴 날, 한밤중에 일어나서 21점을 어떻게 냈을 수 있었을지 생각하는 사람. 그게 빌 월시다. 이긴 경기에서조차 1점을 더 내지 못한 이유를 밤새 복기하는 사람.

그는 계속 쓴다.

“내가 거기서 볼 수 있었던 정보를 잘못 계산했거나 무시한 것은 아닐까? 왜, 어디서 우리의 실행이 무너졌는가? 우리의 결정들, 나의 결정들 중에서 어느 것이 잘못됐거나 완전히 틀렸는가?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내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완벽이었다고 생각한다.” — 같은 장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그가 세 번 반복한 이 단어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완벽주의의 정체를 스스로 진단한다.

“이 모든 것은 점수를 높이거나 더 적은 점수 차이로 지려 한다기보다는, 내가 리더십과 성공을 위한 노력의 전 과정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관련이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풀어야 할 퍼즐이었고, 찾아 제자리에 놓아야 할 조각들이었으며, 해결해야 할 해법들이었다.” — 같은 장

위대함의 동력이 그의 칼날이었다는 걸, 그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책의 가장 무거운 장이 나온다. “Zero Points for Winning(승리에 0점 주기는 곧 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승리에 0점을 받았다.

승리는 패배의 고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 이상도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다음 경기로, 또 다음 경기로 시선을 돌렸고, 각 경기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패배와 함께 오는 끔찍한 감정을 미루는 기회만을 제공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패배나 실수, 좌절도 매우 불안하고 심지어 파괴적이 된다. 자아상을 경쟁의 결과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승리 역시 같은 이유에서 해로워질 수 있다. 즉, 승리가 자신의 가치, 자신에 대한 감정을 규정하기 시작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 같은 장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슈퍼볼을 세 번 들어 올린 사람이, 자기 승리에 0점을 줬다고 고백한다. 그가 받은 트로피들은 기쁨이 아니라, 다음 패배의 두려움을 잠깐 미뤄주는 진통제였다는 거다. 그리고 그 고백 뒤에 한 줄이 있다. “자아상을 경쟁의 결과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결과를 자존감으로 가져갔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지표가 오르면 내가 괜찮은 사람 같고, 지표가 꺾이면 내가 형편없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살면 승리도 해롭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빌은 그 대가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지도 적었다.

“환경의 변동성과 감정적 소진이 당신을 완전히 고갈시킬 수 있고, 당신은 그것과 끊임없이 함께 살아간다. 그것은 당신을 매우 취약하고, 나약하게 만들 수 있다.” — 같은 장

그리고 자신에게 경고를 남긴다.

“팀의 ‘승패 기록’을 자신의 자존감과 동일시하는 파괴적인 유혹을 피하라.” — 같은 장

이 문장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앞의 고백들을 다 읽은 뒤에야 느껴진다. 이건 이론이 아니다. 빌이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후배들에게 남긴 마지막 경고다.

그리고 그는 자기 완벽주의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도 솔직하게 본다.

“초창기에는 나도 그랬다. 내 일을 잘 처리하면 점수가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코칭을 개선하고 팀의 성과 기준을 높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인 이유 중 하나였다.” — 같은 장

점수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그의 철학조차, 뒤집어 보면 자기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엔진이 되어 있었다는 자기 진단.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책이 단순한 리더십 교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고백록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책의 마지막 장은 아들 크레이그 월시가 썼다. 아버지에 대한 장이다. 제목은 “THE WALSH WAY — A Complex Man. A Simple Goal.”

“그는 완벽주의자였고, 완벽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여과되지 않고—그의 의견으로는 불가피하게 오해되고 잘못 적용되지 않고—온전히 실현될 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에만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책임자가 되어야 했다.” — 같은 장

아들이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위대한 아버지가 왜 끝까지 스스로를 놓지 못했는지를, 아들이 가장 짧은 문장으로 요약해버린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단.

“아버지는 가셨지만, 그의 피와 땀으로 얻은 리더십 교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유의미하게. 이 책에서 나눈 자신의 경험 중 무언가가 리더로서 당신 자신의 도전에 가치 있기를 바랄 것이라고 나는 안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고 또 잘 해냈던 일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힘껏 위대해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 — 같은 장 마지막 문단

이 마지막 문단에 와서, 나는 책을 조금 오래 덮고 있었다.

한 인간의 위대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본 느낌이었다.

리더십 책으로 시작해서, 한 사람의 생애로 끝난 책이었다. 퍼즐을 푸느라 한밤중에 깨어 21점을 생각하던 사람. 승리에 0점을 주던 사람. 결국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 그 모든 걸 책에 적어두고 떠난 사람. 그의 교훈을 아들이 마지막 장에 받아 적으며 책을 닫는다.

안도도 있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사람조차 이랬구나. 그 거대한 그림자와 그 거대한 대가가, 나의 작은 실패들 앞에서 묘한 위로가 됐다. 당신도 그랬구나, 라고.

동시에 서늘한 경고라는 것도 안다. 빌이 받은 대가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만한 위대함에 닿지도 않은 내가 같은 길을 걸어서 뭘 얻을 수 있을까. 결과에 자존감을 붙여 두고 사는 한, 승리도 나를 갉아먹고 패배는 나를 무너뜨린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빌 월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더욱 아닐 거다.

그래서 빌은 본인이 결국 그러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지향했던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점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나가며 — 리더십 너머,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났다.

처음 든 생각은 서문에 적었던 그 문장 그대로였다. “어쩌면 다음 번에 올 기회에 내가 조금은 나아지기를.” 다음에 내가 다시 조직을 이끌게 된다면, 그때는 빌 월시의 밑줄들을 조금 더 잘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식의 기대.

그런데 이 후기를 붙잡고 한 섹션씩 나를 뜯어보다 보니, 그 문장이 조금 수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 기회.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다음에 올 리더십 기회”를 상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묘하게 유예하고 있었다. 다음에 제대로 해봐야지. 다음에 인내심 있는 멘토가 되어봐야지. 다음에는 위로도 아래로도 정렬된 리더를 해봐야지. 그 “다음”의 모호함이 오늘의 게으름에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빌 월시의 책에서 내가 제일 오래 멈췄던 건, 사실 전략도 원칙도 아니었다. “빠른 결과는 천천히 온다(Quick Results Come Slowly)” 장의 이 문장이었다.

“나는 이것이 당신의 직업에서도 사실이라고 믿는다. 시작 단계의 노력은 연속적인 노력의 일부이고, 당신의 성과 기준은 연속적인 기준의 일부다.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결과가 된다. 그 노력의 질이 작업의 질이 된다. 하루는 다음 날과 연결되고, 그 달은 이어지는 해들과 연결된다.”

— “빠른 결과는 천천히 온다 (Quick Results Come Slowly: The Score Takes Care of Itself)” 장

하루는 다음 날과 연결된다. 다음 기회 같은 건 따로 오지 않는다. 오늘 내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인내하고, 어떻게 들이받는지가 그대로 다음 날에 붙어서 온다. 같은 페이지에서 빌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당신 자신의 성과 기준이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가 된다. 당신과 당신의 조직은 위대함을 성취한다.” — 같은 장

이 문장이 이번 독서에서 나를 가장 흔들었다. “당신의 성과 기준이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가 된다.” 리더십 책의 마지막 한 줄인데, 읽고 나면 리더십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 스스로에게 허락한 기준이,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한다는 말로 읽힌다.

그러니까 내가 고칠 건 “다음 기회의 나”가 아니라, 지금의 나다.

단순히 “리더십”을 떠나서 — 엘리와 제품을 만들며 주고받는 한 줄의 피드백에서, 조지와의 멘토링에서,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와의 짧은 대화에서 — 지금 스스로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 멈추지 않는 것. 거창한 리더십의 회복이 아니라, 그 정도의 성실함.

사실 이건 내가 예전에 이미 썼던 이야기다. 블로그 한구석에 “판단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져라”라는 글을 적어둔 적이 있다. 남을 빠르게 판단하지 말고, 일단 호기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들여다보라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글이었다. 그 글을 잊은 지 오래다. 최근의 나는 꽤 자주 판단부터 했다. 답답해했고, 먼저 결론을 냈다.

다시 되새겨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친절하지만 엄격하게, 조금 더 나음을 추구하는 삶. 빌 월시가 다른 장에서 “당신은 강한 면모를 갖춰야 한다(You Must Have a Hard Edge)“고 썼을 때 그게 냉정함을 말한 게 아니었던 것처럼, 친절함과 엄격함은 서로의 반대말이 아니다. 나는 둘 다 부족했던 것뿐이다.

그런 사람이 된다면, 점수는 아마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빌 월시의 원래 문장은 팀과 조직에 대한 것이었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며 그 문장을 한 사람 분량으로 줄여서 가져가기로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오늘의 기준으로 정해진다면, 내일의 점수는 내가 굳이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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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Tony Cho

Indie Hacker, Product Engineer, and Writer

제품을 만들고 회고를 남기는 개발자. AI 코딩, 에이전트 워크플로우, 스타트업 제품 개발, 팀 빌딩과 리더십에 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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