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삶의 대부분을 채우는 감정은 대개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계획대로 보내지 못한 하루를 후회하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화를 낸다. SNS를 가득 채우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시기하기도 하고 수준 낮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경멸하기도 한다. 타인을 만나며 드는 나의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며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하고, 타인에 대한 분노와 시기, 경멸이 또 나 스스로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불친절한 식당이나 사소한 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느껴 분노하면서 씩씩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보며 시기하며 그들을 냉소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멸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전에 회사들에서 일하면서 속으로 경멸하던 직원들이 분명 있었고, 회사나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업무 전달에 공공연히 분노하기도 했다. 업무에 있어서 나는 자주 예민해져서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표출하였다. 이런 내 모습들이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전 회사 팀원분과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퇴사한 지 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그렇게 화가 나 있냐고 물었다. 부끄럽지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왜 내 화가 정당한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쓴 AX나 조직 관련 에세이들도 대부분은 어떤 특정 목적보다는 내 분노의 표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이전에 밝히기도 했다. 분노로 글쓰기라니, 언뜻 고상해 보이지만 그 근본이 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은 말 그대로 부정적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타인(또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시기하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니, 나는 정말 구제불능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모두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며, 사소한 것에 화내지 말아야 하며, 타인을 시기하거나 비교하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안 되고 (특히 타인에게) 그걸 표출할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배워왔다. 그래서 내가 “감정 성인(Saint)“이라 부르는,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방향이고, 나는 항상 그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고 항상 정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명상을 하고, 일기를 쓰고, 수행을 쌓고.
만약 “감정 성인”이 플러스(+) 극단에 있는 최고 등급이라면, 나는 감정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대부분을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살고 있으니 마이너스(-) 영역에서 낮은 등급 중 하나인 인간일 것이다. 플러스(+)를 향해야 한다는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높은 등급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 생은 틀려먹었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자책하며 보내고 있지는 않다. 겉으로만 보면 평온한 상태이고, 그저 하루하루 내 할 일과 정해진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내가 너무 사소한 일에 화를 내며 씩씩대면 항상 엘리가 나를 진정시켜주기 때문에 사회 생활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수준이다. 우리는 성인(adult) 이지 않은가? 매일매일이 해피해피할 수 없다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단순히 긍정적인 감정들로만 나를 채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만약 정말 나를 파괴하고 있다면 난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 비율이 높다는 것, 이러한 감정들 그자체에 휩싸이거나 그 때문에 자책하는 순간들이 있기에 가끔은 부정적인 감정들에만 허우적대는 나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느끼긴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닌 걸까 하는 그런 자괴감과 함께 말이다.
그때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어 단숨에 읽게 되었다. 《악마와 함께 춤을》의 저자 크리스타 K. 토마슨은 감정과 도덕을 오래 연구해 온 철학자다. 시기, 질투, 분노 같은 “나쁜 감정”을 변호하는 게 이 책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나는 “감정 성인” 플러스(+) 방향으로 업그레이드하지는 못했으나, 내 부정적인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는 일과 내 삶에서 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만큼은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크게 바뀌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혹시나 또 내가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방황하고 있을 때 이 책이 길을 다시 찾아주길 바라고, 그것이 짧게라도 이 리뷰를 쓰게 된 계기이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내 식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부정적인 감정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내가 삶과 사람과 의미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신호다. 문제는 감정을 느끼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고 정당화하고 생산성으로 바꾸려는 조급함이다.
”감정 성인” 등급표가 잘못됐다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우리 모두가 사회적 잣대로 세워둔 그 “감정 성인” 등급표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한다.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좋은 긍정”, “나쁜 긍정”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긴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만 유독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어떨 땐 분노해도 되고 어떨 땐 안 되고,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경멸하는 건 무조건 안 된다고.
그런데 과연 나쁜 감정을 피하려고 껍데기 속의 거북이처럼 살아가는 게 가치가 있을까?
저자는 여러 철학자의 주장과 그 배경을 짚어가면서, 부정적인 감정도 긍정적인 감정과 똑같이 이중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그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 나아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남을 시기하는 감정조차도, 누군가를 경멸하는 감정조차도 그렇다.
우리는 상대와 비교하며 자아를 형성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찾기도 한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에만 기대 자아를 만들고 존재 의의를 찾는 건 문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감정 성인”이 인격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기준 그 자체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야생성을 거세하는 부자연스러운 잣대다.
감정은 나름의 지능이 있어 때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정이 우리말을 듣도록 훈련시키기보다는 우리가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책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비유는 지렁이였다.
지렁이다움을 모두 벗어 던져야만 녀석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지렁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앞에서 그려본 그 등급표는, 사실 기준 자체가 틀린 표였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응당 느끼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저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 그 사실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다.
분노로 쓴 글, 그리고 1년이 지나도
앞서 나는 최근에 쓴 AX 관련 에세이들(그중 한 편)이 어떤 특정한 목적보다 내 분노의 표출 수단이었고, 그게 부끄럽다고 적었다. 그런데 책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다르게 보였다. 그 글들의 근본에 있는 분노는, 내가 조직과 일을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는 신호였다. 그동안 여러 실패와 경험을 통과하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분노로 쓴 글들이 대신 역설하고 있었던 거다.
저자는 분노를 쓸모로 옹호하는 태도를 오히려 경계한다.
불의에 맞서 싸우기 위한 건설적인 분노만 정당하다는 것은, 감정이 생산적일 때만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 분노를 글로 쓴다는 건, 그 근본 감정이 부정적이더라도 행위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이 감정을 통제하려 애쓰기보다, 어떻게 글로 더 잘 승화시킬지 고민하는 편이 내 삶에 훨씬 유익할 거다.
분노를 다시 바라보자, 오래 미뤄둔 질문 하나에도 답할 수 있게 됐다.
퇴사한 지 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그렇게 화가 나 있냐고. 그때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내 감정의 정당성을 변명했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화를 내는 건 그 관계에 계속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답하겠다. 겉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1년이 지나도 화가 남아 있다는 건 그 회사와 사람들에게 그만큼 애정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내 분노의 뒤편에는 내가 쏟은 관심과 시간과 애정이 있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 아쉬움이 남들 눈에는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처럼 비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감정 또한 나의 오늘을 움직이는 수많은 동력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 책 제목 그대로 매일매일 악마(부정적인 감정들)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건 아닐까.
판단하지 말고, 그냥 느껴라
예전에 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판단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져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말은 타인뿐 아니라 내 감정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도대체 왜 나쁜 감정을 정당화하는 걸까? 내 감정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만들지 않고 그냥 느낄 수는 없을까?
우리는 감정에 대해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린다. 부정적인 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감정에 조급하게 매기는 판단이 문제인데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그 감정을 정당화하려 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실패, 방황 또는 외로움을 맞닥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만들기를 원한다.
분노를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악당을 하나 만든다. 악당이 생기면 내 안의 실패와 외로움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진다. 감정을 피하려는 그 태도가, 정작 감정 자체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거다.
“난 그렇게 속 좁거나 찌질하지 않은데”, “나는 이것보다 조금 더 쿨한 사람인데”, “난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나도 늘 이런 말로 스스로를 기준에 묶어둔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이 그 기준을, 내가 나라고 착각해 온 그 기준을 무너뜨릴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한다.
앞서 적은 그 자괴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닌 걸까” 하는 그 마음도 결국 여기서 나온 거였다. 내 감정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감정이 내가 세워둔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을 흔들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정작 흔들려야 했던 건 감정이 아니라 그 기준이었는데.
저자의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라. 그냥 느끼는 법을 배워라.
그냥 느끼면 된다. 판단하지 말고, 내 감정에 충실하게 분노하고 경멸하고 시기하고. 그렇게 나 자신과의 대화가 끝나면 다시 털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앞서 나는 회사에서 속으로 경멸하던 직원들 얘기를 꺼냈다. 책은 그 경멸조차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경멸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나침반을 집터로 삼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다.
경멸을 느끼는 건 괜찮다. 다만 누군가를 깔보는 일을 내 정체성의 기둥으로 세우면, 결국 내가 누구인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느끼되, 거기에 집을 짓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쁜 감정은 당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다. 이것들은 정확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즉 당신이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가며 (그냥 느끼는 게 제일 어렵다)
그러니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닌 걸까. 책을 덮은 지금도 그 답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질문이 바뀌었다. 등급표에서 내 자리가 몇 점인지 묻는 대신, 나는 이제 이 감정들이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말해주고 있다고 듣는다.
예전 같았으면 1년이나 남은 분노를 내 못난 인성의 증거로 읽었을 거다. 지금은 그게 내가 그 시간과 사람들을 소중히 여겼다는 증거로 읽힌다. 바뀐 건 내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읽는 방식이다.
등급이 오른 게 아니라, 등급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재밌는 게 이렇게 생각하니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냥 느껴라”는 참 어려운 주문이다. 책은 왜 부정적인 감정도 그냥 느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설득하지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는 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는 막막함을 느낄 수도 있다.
책에서 말하는 실천 항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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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옆집 차가 부럽다.” “나는 지금 화났다.” “저 사람이 망해서 고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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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설명하지 않는다. 변명, 옹호, 자기비난, 합리화 없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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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느낀다. 불편함에서 빨리 빠져나오려는 충동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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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묻는다. 이 감정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상처받고,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신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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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악당으로 만들지 않는다. 분노와 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계관을 조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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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감정만 허용하지 않는다. 감정이 쓸모 있을 때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감정을 또 통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 항목 이전에 저자의 설득 과정과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고, 이 감정들이 결국은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정원의 지렁이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쁜 감정을 쫓아내면 삶은 조용해지고, 나쁜 감정과 춤추면 삶은 시끄러운 채로 살아 있다.
Amor Fati — 기쁨과 고통, 모두를 사랑하라.
니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격언이 아모르 파티다. 이 라틴어는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의미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건 좋은 것과 나쁜 것, 즐거운 것과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야성적이고, 자의적이고, 환상적이고, 무질서하고, 경이로운” 모든 것을 포함한 삶 전체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길들이지 마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는 나쁜 감정과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다. 운명을 사랑하려면 일단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받아들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과 싸우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세상에 좋은 책은 많지만, 지금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분노하고 시기하고 경멸한다. 다만 이제는 그게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아직 내 삶에 단단히 붙어 있다는 증거라고 읽는다. 그렇게 오늘도 악마와 함께, 한 곡 추는 수밖에(…).
추가로 밑줄 친 문장
머리가 어디서 끝나고 가슴이 어디서 시작되는지가 항상 분명한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감정은 나름의 지능이 있어 때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기도 한다.
변명도 옹호도 없이 직면하라.
다윈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열어 두라.
우리가 시기를 회피하는 이유는 실패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실패할 때가 있고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이라고 일컫는다.
누구도 불완전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
누군가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그런 사람들’(경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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