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소설 《삼체》에는 지자(智子)라는 게 나온다. 태양계에서 4광년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 세 개의 항성이 서로의 중력에 끌려 예측 불가능하게 도는 곳, 그래서 어느 날은 모든 게 불타고 어느 날은 모든 게 어는 지옥 같은 행성에 삼체인이 산다. 그들은 안정적인 별을 찾아 떠나야 한다. 마침 지구에서,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인류라는 종에 대한 믿음이 박살 난 천체물리학자 예원제가 그들에게 좌표를 쏘아 보낸다. 여기로 오라고. 이 별은 태양이 하나뿐이라 안정적이라고. 삼체인은 함대를 띄운다. 함대가 지구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50년이다.
문제는 450년이라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인류의 과학이 삼체 문명을 따라잡으면, 침공은 실패한다. 그래서 삼체인은 함대보다 먼저, 빛의 속도로 무언가를 보낸다. 지자다. 양성자 하나 크기로 접힌 초지능 컴퓨터. 이게 지구에 도착해서 하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시다. 인간의 모든 대화와 문서와 실험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본다. 다른 하나는 입자가속기를 교란해서, 인간이 물질의 더 깊은 층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는다. 기초과학을 봉쇄하는 것이다.
지자가 온 뒤 인류는 별을 보면서도 별의 법칙을 새로 알아내지 못한다. 컴퓨터는 빨라지고, 앱은 늘어나고, 도시는 화려해진다. 그런데 가장 밑바닥의 과학은 멈춰 있다. 인류는 자기가 멈춰 있다는 것조차 한참 뒤에야 깨닫는다. 명작 SF다. 인물도 서사도 반전도 좋지만,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 지자라는 설정이다. 적이 우리를 죽이러 오기 전에, 먼저 우리가 더 똑똑해지는 길을 막아둔다는 것.
그리고 소설을 덮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인류에게 지자가 온 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어딘가에서 조용히 멈춰 서고 있는 게 아닐까.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고?
맞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AI, 그 대형 LLM 모델들이 우리에게 온 지자라는 얘기다. 지자는 인류에게서 기초과학 발전을 뺏어갔다. 당연히 현대의 AI는 앞으로 기초과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말하는 지자=AI 라는 얘기는 설정상 동치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유사점은, 지자가 인류에게서 기초과학을 뺏어갔듯이 AI가 인류에게서 “무언가”를 뺏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특히, AI에 의존하는 인간의 게으름이 극대화되었을때 말이다. 이 글은 내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AI 기반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약간의 비약과 스스로의 망상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써보려 노력한 글이다.
그런데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선을 하나 그어야겠다. 나는 AI라는 단어만 들으면 눈부터 흘기고 AI를 놔두고 직접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최근 재밌는 사례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 X에 모네의 〈수련〉 그림 일부를 올리고는 이렇게 적었다.
“AI로 모네 스타일 이미지를 만들어봤다. 진짜 모네보다 왜 열등한지 설명해달라.”
사람들이 신나게 달려들었다. 구도가 엉망이라고, 색이 따로 논다고, 감정이 없다고, 자연이 부자연스럽다고, 한눈에 봐도 AI slop이라고. 댓글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진짜 모네였다.
올린 사람은 익명의 개념미술가였고, 사람들이 실제 명화를 보면서 “AI라서 이렇게 못 그렸다”고 분석하는 그 광경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거였다. 황당하고 웃긴 이야기다. 사람들은 작품을 본 게 아니라 라벨을 봤다. 같은 캔버스를 두고 “AI”라고 쓰여 있으면 결함부터 찾고, “모네”라고 쓰여 있으면 의미부터 찾는다.
이게 한쪽 진영만의 문제도 아니다. 반대 방향으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독일 작가 보리스 엘다그젠은 AI로 만든 흑백 인물 사진을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 어워드에 냈고, 당당히 수상했다. 그리고 이건 사진이 아니다, AI 이미지를 사진과 같은 칸에서 겨루게 하면 안 된다고 시상을 거부했다. 그는 자기 작업을 사진(photography)이 아니라 프롬프토그래피(promptography)라고 부르자고 했다. 한쪽에서는 진짜 명화를 AI라고 깎아내리고, 다른 쪽에서는 AI 이미지가 사진상을 받는다.
한 심리학 연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고 한쪽엔 “사람이 그렸다”, 다른 쪽엔 “AI가 그렸다”고 라벨만 바꿔 붙였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AI라고 들은 쪽이 같은 그림을 더 낮게 평가했다. 재밌는 건, 창의성만큼은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 응답자일수록 그 부정 편향이 더 컸다는 점이다. 인간의 창의성을 깊이 믿는 사람일수록 AI라는 라벨에 더 날을 세운다는 거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러니 이 글은 AI를 혐오하거나, AI를 쓰지 말자거나, AI가 사실은 별 쓸모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AI라고 무조건 깎아내리는 것도, AI라고 무조건 떠받드는 것도, 내가 보기엔 둘 다 게으른 판단이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조금 더 현상에 집중하고자 한다.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일자리 얘기가 아니다. 일자리보다 먼저 없어지는 것들 얘기다.) 거기에 한 열 단계쯤 비약과 약간의 SF적 상상력을 얹으면, AI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조용히 거둬가고 있는 건 아닌지, 누가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거나 통제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무한한 편의를 안겨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천천히 멈춰 세우는 것이다. 내 스스로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으로 확장된 사고실험(이라고 쓰고 망상)을 해본 이야기라고 해두자.
나의 나름 근거 있는(다양한 사례 기반의) 헛소리들을 읽으며, 원치 않게 마주한 이 AI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지는 당신의 몫이다.
지자는 인류를 총으로 쏘지 않았다. 그저 더 깊이 알아내는 길을 막았을 뿐이다. 그리고 인류는 멈춰 있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AI는 점점 더 인간에게 무한한 생산성과 편의를 줄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AI가 인류를 멸종시키고 지구를 정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에 젖어 인간은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AI를 열렬히 지지한다
내가 그동안 쓴 에세이들과 이 글의 논지만 보고 나를 AI를 잘 안 쓰는 레거시 시니어 개발자(라고 쓰고 꼰대, 또는 시대에 뒤처진 개발자라고 읽는)로 판단했다면, 그건 큰 오해이며 내 글들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나는 2025년 4월에 이전 회사를 나왔는데,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AI였다. 그 정도로 이 기술을 좋아한다. 시작은 Cursor였고, 25년 상반기 내내 Claude Code를 붙들고 살았고, 하반기부터는 줄곧 Codex를 쓴다. 예전에 세팅해둔 OpenClaw 기반 자비스 시스템은 계속 키우는 중이다. 식단, 운동, 건강, 일정 같은 개인의 삶부터 Slack, 회의록, 이슈 리포팅 같은 회사 업무까지 에이전트가 광범위하게 손을 댄다. 또 다른 에이전트인 Hermes는 따로 세팅해서 리서치와 위키 정리, 재무 같은 걸 맡긴다. 남들이 공유하는 사례나 스킬이 보이면 그때그때 세팅해보고 테스트해본다. 새 기술이 나오면 나한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FOMO가 아니라 호기심이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재미다.
지금 이 블로그 플랫폼의 자잘한 요소들도 내가 코드를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바이브 코딩으로 튜닝한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초안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AI 글쓰기 하네스가 맞춤법과 오타를 잡아주니, 그 뒷배를 믿고 일단 막 쓰게 된다. 예전엔 ‘잘’ 써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오히려 ‘안’(못) 썼는데, 지금은 뒷배가 있으니 이런 글도 부담 없이 시작한다. 생산성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분명히 해두자. 나는 AI로 퇴고와 리뷰를 받고 자료 조사를 도움받을 뿐, 이 글을 포함해 내 블로그 글은 전부 내가 직접 쓴다. 만약 AI에게 글 작성을 통째로 위임했다면, 지금 내 블로그엔 글이 열 배는 많았을 거라고 감히 단언한다.)
일도 그렇다. 예전엔 모바일 앱 하나 런칭하려면 서버 개발자, 모바일 개발자 최소 두 명이 필요했다. 풀스택을 한다고 하면 깊이가 없다고 의심받았고, 나도 면접에서 그런 지원자를 걸러냈다. 그런데 지금은 나 혼자 그 전부를 한다. 나는 iOS로 앱을 런칭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모바일은 10년 전 Android, 최근의 약간의 Flutter가 전부고, 커리어 대부분은 백엔드였다). 그런 내가 지금은 iOS 앱을 만든다. 출시도 했으며, 데이터 분석도, 디자인도, 마케팅도, 또 다른 겉핥기로만 알던 영역들도 어느 정도는 혼자 커버한다.
이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건, AI 시대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먼저 인정하고 싶어서다. 나 같은 사람이 혼자 무언가를 벌이기에 이만한 시대가 없다. 이건 진심이다.
기업 단위로 봐도 마찬가지다. 컨설턴트가 GPT로 과제를 더 빨리 더 높은 품질로 해냈다느니, 콜센터 상담사가 더 많이 처리했다느니 하는 연구는 검색하면 차고 넘친다. (굳이 여기 나열하지 않겠다. 어차피 핵심이 아니니까.) 나는 이전 여러 글에서, 조직 성과에 AI가 기여하는 비율이 당장은 작을 수밖에 없고 그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조직과 일하는 방식이라고 여러 번 지적했다. 그 입장은 지금도 같다. 도구는 강력한데 그 도구를 담는 그릇이 그대로면 효과는 새어나간다. 그럼에도 많은 조직이 예전엔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내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자, 여기까지는 다 좋은 얘기다.
AI와만 일한 지 1년이 넘은 지금, 내 온몸이, 내 본능이 자꾸 신호를 보낸다. 당신이 쇼츠를 무한 스크롤하다가 어느 순간 올라오는 그 느낌. 매일 고열량 배달 음식만 시켜 먹다가 문득 드는 그 느낌. 맞다,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바로 그 신호.
“아,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숏폼이 나쁘니 보지 말라거나, 배달 음식이 해로우니 끊으라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이 즐겁고도 해로운 것들과 앞으로도 같이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다. 도파민에 절어 쇼츠를 끝없이 넘겨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가끔 내게 유희를 주는 이걸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가끔은 정말 몸에 1도 안 좋은 탄수화물 덩어리를 먹어주고 싶다. 1이냐 0이냐가 아니라 0.x 어디쯤에서, 좋은 걸 즐기면서도 건강해지고 싶은 그 마음. 바로 그게, 지금 나만큼 AI를 써서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있는 당신이, 그러면서도 이대로 계속 가면 다 망할 것 같은데, 내가 망할 것 같은데, 하고 느끼는 그 신호다.
이 신호는 아마 바이브 코딩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낀다. 그걸 소화하는 방식이 제각각인데, 크게 세 부류로 갈린다.
첫 번째는 AI 프론티어 그룹이다. 이제 나는 단순한 코더가 아니라 오케스트레이터다, 중요한 건 Taste(취향, 감각)다, AI를 최대한 많이 써라, 같은 멋들어진 말을 하면서 그 신호를 애써 무시하는 쪽. 솔직히 나도 한참 이 상태였다. 두 번째는 절망주의자다. 이제 개발자는 필요 없다며 무너져서, 현생에선 딱히 그럴듯한 노력을 1도 하지 않으면서 SNS에 “이제 큰일났어요”만 반복하는 쪽. 세 번째는 인간 가치 우선 그룹이다. AI 시대에도 결국 인간의 가치가 중요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필요하면 AI를 제한해서라도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쪽. 지금의 나는 여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그룹은 소리 내어 말하질 못한다. 입을 떼는 순간 첫 번째 프론티어 그룹에게 꼰대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는데 적응을 못 한다느니, 네가 말한 건 다 곧 AI로 대체된다느니. 그래서 현실에선 의외로 세 번째 그룹이 많은데도, 인터넷에선 첫 번째 그룹의 목소리를 두 번째 절망주의자들이 받쳐주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똑똑한 세 번째 그룹의 주니어들이 종종 이렇게 묻는다. “AI만 쓰니까 제 실력이 안 쌓이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럼 프론티어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AI한테 물어봐라, AI 시대엔 오케스트레이터가 돼야 한다, 마치 당연한 걸 왜 모르냐는 투로. 개발자들(나를 포함한)의 처참한 공감 능력은 원래도 유명했지만, 지금의 AI 프론티어 그룹은 특히 심하다. 기술 업계의 고질적인 독성(toxic) 말투.(프론티어 그룹만 그렇다고? 아니 두번째, 세번째 그룹도 솔직히 마찬가지다.) 자기도 그저 빅테크가 만든 모델을 빌려 쓰는 처지면서 말이다. 물론, 이건 다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 이 글의 도입부인데 당신이 여기까지 읽기를 선택했다면, 나는 당신이 세 번째 그룹의 생각에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동의한다고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그 “공감”을 댓글로 남겨준다면, 그날 하루는 당신 덕분에 또 행복할 거다.)
눈치챘겠지만, 내가 하려는 얘기는 AI로 생산성을 극대화하거나 비용을 최적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건 이미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 인정하고 들어가는 부분이다. 내가 묻고 싶은 핵심은 이거다.
AI를 통해 일하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정말로 삶이 더 나아졌는가.
가짜노동을 없애주는 기계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AI가 없애준다’고 말하는 그 일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갈라봐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70년 전에 던진 구분이 여기서 의외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세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째는 노동(labor)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 먹고, 씻고, 청소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순환이다. 결과물은 오래 남지 않고 곧 소비된다. 아렌트는 이 일에 묶인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이라고 불렀다. 우리 업무로 옮기면 이메일 정리, 자료 요약, 반복 코딩, 고객 응대, 회계 처리, 문서 정돈 같은 소모적 반복이다. 지금의 AI 자동화가 가장 먼저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응당 이런 건 사라지면 좋다, 고 우리는 생각한다.
두 번째는 작업(work)이다. 인공의 세계를 짓는 제작. 의자, 집, 책, 제도, 도구, 작품처럼 어느 정도 지속되는 것을 만든다. 자연의 순환과 달리, 인간이 만든 세계를 세운다. 결과물은 만든 사람보다 오래 남기도 한다. 아렌트는 이 영역의 인간을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이라 불렀다. 업무로 옮기면 글쓰기, 프로그래밍, 디자인, 연구, 영상 제작이 여기다. 단순 노동이 아니라 작업이다. 작년의 바이브 코딩 혁명(?)이 충격이었던 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이 작업(work)이 대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행위(action)다. 타인 앞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 말하고, 약속하고, 설득하고, 사과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하고, 여럿이 함께 사는 세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아렌트는 여기에 두 개의 단어를 붙였다. 다수성(plurality),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만 행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탄생성(natality), 인간은 매 순간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세계에 들여올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이 인간인 가장 깊은 이유를 아렌트는 여기에 뒀다.
자, 그럼 좀 더 인간적인 이 행위 영역이야말로 AI가 넘볼 수 없는, 사람만의 자리일까. 현실로 끌어와 보자. 사과문, 연설문, DM, 자기소개서, 논쟁 글, 연애편지. 인간이 가장 어려워하고 가장 미루는 이 행위들은, 바로 그 게으른 본성 덕분에 AI가 가장 많이 동원되는 영역이다. 그리고 몇 가지 허술한 실수로 가장 자주 들통나는 영역이기도 하다. 얼마 전 SNS에서 남자친구가 GPT로 사과문을 써 보냈다고 정 떨어졌다는 글, 어떤 기업의 공지가 AI 티가 난다고 비난받는 글을 봤다. 그런데 이건 AI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AI를 어설프게 써서 들킨 인간의 실수다. 잘 썼으면 아무도 몰랐을 거다. 그렇게 보면, 아렌트가 나눈 인간 활동의 세 영역 중 AI가 손대지 못할 곳은 사실상 하나도 없어 보인다. 아렌트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대신 시킨 순간, 그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라고.
모든 목소리를 AI가 대신 내준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소통하고 있는 걸까. AI가 노동을 덜어준다는 건 좋다. 그런데 작업과 행위까지 대신하면서, 그 과정에서 인간이 얻던 무언가가 조용히 사라져가고 있다. (재밌는 건, 지금 이 문단을 쓰는 동안 나는 Codex에 개발과 테스트를 돌려놓고, 고객 대응 이메일 작성까지 시켜둔 채로 수건을 개고 있다는 거다. 작업도 행위도 AI가 가져갔다. 나에겐 노동만 남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게 있다. 그럼 AI가 노동이라도 깨끗하게 없애주고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가짜 노동》에서, 현대의 일터가 실제 가치와 무관한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보고를 위한 보고서, 회의를 위한 회의, 평가를 위한 준비. 그는 산업혁명 시대의 도덕, 그러니까 오래 일할수록 미덕이라는 ‘산업적 숙취(industrial hangover)‘가 지식노동 시대에도 그대로 남아, 사람들이 가짜로라도 바빠 보이려 한다고 봤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직업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를 ‘xx같은 일들(bullshit jobs)‘이라 불렀다. 그는 이걸 다섯 유형으로 나눴다. 윗사람을 중요해 보이게 만드는 시종(flunkies), 경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용역깡패(goons), 망가진 시스템을 임시로 때우는 땜질꾼(duct tapers), 한 일보다 했다는 증거를 만드는 체크박스꾼(box tickers), 그리고 남의 일을 관리한다며 새 가짜 일을 만들어내는 작업반장(taskmasters). 그레이버는 이런 일이 사람에게 단순한 지루함을 넘어 도덕적 상처를 입힌다고 했다. 인간은 자기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걸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AI를 써서 이 가짜 노동과 xx같은 일들을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불을 켜고 환영하겠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내가 지금 수건을 개고 있는 것처럼) 도구로서의 AI는 이 가짜 노동을 여전히 못 없애고 있다. 오히려 일부 조직에선 AI 덕분에 가짜 노동의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예전엔 무의미한 보고서도 사람의 시간과 고통이 들어가야 만들어졌다. 그 고통이 일종의 제동장치였다. 그런데 이제 회의록, 보고서, OKR, 전략 초안, 성과 피드백을 거의 공짜로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 문서 만드는 비용이 0에 가까워지면 문서가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문서 요구가 늘어난다. 그레이버의 다섯 유형 중 체크박스꾼(한 일보다 했다는 증거를 만드는)은, AI를 만나 핵무기를 손에 쥔 셈이다.
게다가 AI가 만든 슬라이드와 대시보드는 너무 그럴듯하다. 그래서 AI 시대의 가짜 노동은 더 이상 허술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일보다 더 깔끔하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빅테크에서 중간관리자들이 AI 때문에(덕분에?) 잘려나가고 있다지만, 그게 진짜 AI의 성능적 결과 또는 생산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해고를 하면 주가가 떨어지겠지만 AI 덕분에 구조조정을 한다고 발표하면 주가가 오르는 시장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가짜 노동이 아니다. 진짜 노동 쪽이다.
노동이 AI로 100% 대체되는 게 무조건 좋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반복이 하찮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복 속에서 리듬이, 몸의 감각이, 세계의 저항이, 미세한 판단이 생긴다. (수건도 자꾸 개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인간은 마찰을 싫어해서, 귀찮고 껄끄러운 일을 AI로 떠넘긴다. 나도 새 환경을 세팅하거나 데이터를 옮기는 일을 AI한테 맡긴다. 하지만 모든 마찰이 낭비는 아니다. 나쁜 마찰이 있고 좋은 마찰이 있다. 불필요한 결재, 느린 도구, 중복 보고는 나쁜 마찰이다. 없애도 된다. 그런데 문제를 이해하려 머무는 시간, 손으로 해보는 시행착오, 재료가 내 의도를 거스르는 순간은 좋은 마찰이다. 이건 없애면 안 된다. 대부분의 AI 제품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마찰 없음(frictionless)‘을 판다.
그리고 모든 걸 AI에 맡기고 나면, 같은 일을 다시 할 때, 그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어도 또 AI를 부르게 된다. (Codex의 브라우저 조작 기능은 나 대신 클릭까지 해준다.) 단순히 토큰을 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다. AI가 그 일을 제대로 못 해내는 순간, 나는 짜증이 잔뜩 나서 사람에게는 절대 안 할 말투로 기계에 피드백을 한다. 의존이란 그런 거다. 평소엔 안 보이다가, 도구가 어긋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드러난다.
조금 더 사적인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스케치하는 습관을 제1의 업무 습관으로 삼아왔다. 엘리는 내 스케치를 보면서 이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냐고 놀리지만, 그 현대 미술 같은 낙서들은 15년간 내 일의 핵심 도구였다. 하얀 배경에 난잡하게 갈겨진 선들로 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품 기획을,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그렸다. 나는 직군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제발 마우스나 키보드로 생각을 정리하지 말라고. 코드부터 쓰지 말고, 피그마부터 열지 말라고. 손으로 스케치하는 과정은 말 그대로 내가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내 스케치가 언어도 아니고 정형화된 도식도 아닌, 그냥 현대 미술이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언어나 깔끔한 다이어그램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생각을 담기엔 너무 좁은 그릇이라서다. (요즘 들어 피카소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걸 리처드 세넷이라면 ‘재료 의식(material consciousness)‘이라고 불렀을 거다. 장인은 머리로 설계한 걸 손으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손으로 재료를 만지면서 비로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만드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라고. 내 난잡한 스케치가 딱 그거였다. 그리는 동안 생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AI를 쓰기 시작하면서 스케치하는 절대 시간이 줄었다. AI한테 몇 마디만 하면 그림도 곧잘 그려주니까 손으로 했으면 한참 걸렸을 과정을, AI는 현대 미술이 아니라 누구나 알아보는 깔끔한 다이어그램으로 순식간에 뽑아준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난해한 스케치를 던지며 “이거대로 해주세요” 하는 무책임한 대표가 아니다. 말끔한 기획안을 건넨다.
그런데 아주 재밌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현대 미술 같던 내 스케치에 담긴 아이디어는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로 설명하고 기억해낼 수 있었던 반면, AI가 깔끔하게 뽑아준 기획안은(퀄리티가 나쁘거나 내용이 틀린 게 절대 아니다) 일주일만 지나도 세부 사항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부하 직원이 API를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내가 코드를 나름 읽고 PR을 승인했는데, 몇 달 뒤 그 API에 문제가 터져 들여다볼 때 느끼는 그 생경함(하필 그 직원은 연차일 것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안다고 그 일을 다 안다고 착각했던 나는, 흔히들 말하는 오케스트레이터처럼, 정작 그 과정에서 내 사고 행위가 빠져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MIT 미디어랩의 한 연구는 이걸 ‘인지 부채(cognitive debt)‘라고 불렀다. 에세이를 쓰게 하면서 한 그룹은 LLM을 쓰게 하고 한 그룹은 맨머리로 쓰게 했더니, LLM을 쓴 쪽은 뇌의 연결성이 더 낮게 측정됐고, 자기가 방금 쓴 글의 문장조차 제대로 인용해내지 못했다. 결과물의 질은 좋았는데, 그 글이 ‘내 것’으로 남지 않은 거다. 빚처럼, 당장은 청구서가 안 날아온다. 천천히 쌓일 뿐이다. (다만, 이 연구가 AI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라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똑똑하게 해야 한다고 믿어온 내 입장에서, 이건 치명적인 트레이드오프다. 생산성을 극대화하려고 스케치를 내려놓은 선택이, 정작 내가 만든 그 어떤 아이디어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스케치를 먼저 하고 정리된 다음에 AI한테 맡기면 되지 않냐고? (에이, 당신은 정말 그렇게 하나. 웃기지 마라. 노력하면 된다는 영양가 없는 말도 하지 마라.) 일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 결국 우리 모두는 번거롭고 느려터진 스케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지금 시대에 AI를 쓴다는 건 그런 대가를 치르는 일이다. 예전보다 열 배 많은 결과물을 쏟아내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닌 상태.
내가 지금, 헛소리일지언정 내 생각의 과정만큼은 빼앗기기 싫어서, 이렇게 비문을 쌓아가며 굳이 직접 타이핑하며 글을 쓰는 이 무의미한 저항을 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반론이 하나 떠오를 거다. 그래서 AI가 일을 대신해준다는데, 그게 나쁘다는 거냐. 노동에서 해방되는 건 인류의 오랜 꿈 아니냐.
맞다. 그래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노동에서 해방되는 건 정말 좋은 일일까.
장수 마을로 유명한(그 통계부터 요즘은 의심받지만) 일본 오키나와에는 ‘은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고 한다. 대신 ‘이키가이(生き甲斐)‘가 있다. 아침에 일어날 이유라는 뜻이다. 코스타리카의 어느 장수 마을에서도 같은 걸 ‘살아갈 이유’라고 부른다. 그냥 미담 같지만, 이키가이가 있다고 답한 사람들이 몇 년 뒤에 더 많이 살아 있더라는 연구가 실제로 있다. 죽는 날까지 할 일과 쓸모가 있었다는 것, 그게 차이였다. (과학적인 연구냐에 대한 비판이 많은 연구이다. 수명과의 인과성은 조금 더 따지고 볼일이다. 다만, 연구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건 하나다. 스스로 원해서 그만두고, 그만둔 뒤에도 의미 있는 무언가로 하루를 채우는 사람은 괜찮다는 것. 인과성은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상관성은 있다.)
그러니까 진짜 변수는 ‘노동’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목적이 뚜렷한 사람이 더 오래, 그리고 더 또렷한 정신으로 살더라는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그렇다면 노동은 왜 그렇게 오래 인간 삶의 중심이었을까. 심리학자 마리 야호다는 일이 우리에게 주는 건 돈만이 아니라고 했다. 일은 하루에 골격을 세우고(시간 구조), 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연결해주고(사회적 접촉), ‘나는 쓸모 있다’는 감각(목적)과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주고, 규칙적으로 몸과 머리를 굴릴 거리(활동)를 준다. 임금은 그 다섯 바깥의, 가장 눈에 잘 보이는 하나일 뿐이다. 노동이 사라진다는 건, 우리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그 다섯 개가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얘기를 다시 해보자. 그가 인간 활동의 정점에 둔 행위(action)의 핵심은 탄생성, 그러니까 매 순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이었다. 노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시작의 무대를 매일 배달해주던 시스템이었다. 월요일마다 다시 시작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노동을 통째로 들어내면, 우리가 잃는 건 월급이 아니라 매일 다시 시작할 자리다.
그래서 무의미한 노동, 착취적 노동, 끝없는 생존 반복은 인간이 싫어하는 게 맞다. 거기서는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의미 있는 제작과, 깊이 빠져드는 몰입과, 세계에 손을 대는 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AI가 일자리를 빼앗기 한참 전에 가장 먼저 빼앗아가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고, 월요일이 싫고, 경제적 자유를 꿈꾸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통해 살아가고 성장하고 자기를 확인한다. AI가 내 일을 대신할 때 나는 해방되는 걸까, 아니면 좋아하던 세계와 접촉하는 감각을 잃는 걸까. 어쩌면 돈만 남고 다른 모든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일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MBTI가 N이면 더 유리할 거다.) 어느 날 당신에게 100억이 생겼다. 어떤가, 기분이 좋은가.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떠올려보자. 세계 여행, 원하던 집, 어느 정도의 여유. 다 떠올렸으면, 이제 그 모든 게 실제로 충족된 상태를 상상해보라. 돈이 무서운 건 여기다. 없을 때는 조금만 있어도 행복인데, 어느 선 이상으로 채워져서 그게 유지되면, 더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 상태가 그냥 뉴노멀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계속 짜릿할 거 같다고? 맞다. 나도 아직은 그럴 것 같다. 이걸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라도 돈은 한번 제대로 벌어봐야 한다. 아직 내가 이런 주장을 하기엔 좀 모자란다는 생각도 든다. 근데, 무슨 얘기하는지는 아실테니 눈치껏 넘어가자.) 돈이 전부인 삶이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다. 살아갈 목표를 또렷하게 주니까. 그런데 그 돈이 당신이 원하던 모든 걸 이미 다 채워줬다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떨까. 그래도 계속 행복할까.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답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겠다. 그 모든 것이 충족된 바로 그 순간 내가 불행하다면, 도대체 왜 불행할까.
복권에 크게 당첨된 사람들을 추적했더니 일반인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 않더라는 오래된 연구가 있다. 오히려 친구와의 수다, 아침 식사 같은 평범한 즐거움이 당첨이라는 정점에 빛이 바래 있었다. 큰돈은 행복의 기준선을 잠깐 흔들 뿐, 사람은 곧 제자리로 끌려 돌아온다. (평균 회귀!) 새로 얻은 것에 금방 익숙해지고, 그래서 또 다음 것을 좇아 달린다. (오해는 말자. 이후의 대규모 추적 연구는 반대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대다수에게 돈은 행복을 계속 올려준다. 다만 돈이 끝내 못 채우는 칸이 따로 있다는 거다.)
왜 다 충족됐는데 불행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100억은 야호다가 말한 여섯 칸 중에서 ‘돈’ 하나만 채운다. 시간의 구조도, 사람과의 연결도, 쓸모 있다는 감각도, 내가 누구라는 정체성도, 매일 몸과 머리를 굴릴 거리도, 돈으로는 살수없다. 나머지 다섯 칸이 텅 빈 채로 통장만 채워지는 것이다.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좋든 싫든 그 다섯 칸을 담던 그릇을 통째로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동에서 해방되는 게 좋냐고 물으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한다. 벗어나고 싶은 건 무의미한 노동이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고. 우리가 진짜로 빼앗기면 안 되는 건 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라고.
AI는 노동(당신이 하기 싫어하던)을 가져가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AI가 당신의 일자리를 가져가기 한참 전에, 이미 조용히 가져가고 있는 게 있다. 결과물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그중 어느 것도 내 것 같지 않은 감각.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빠져나간 자리에 산출물만 차곡차곡 채워지는 상태. 앞에서 스케치를 내려놓으며 잃어버린 그 소유감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상실이다.
아직은 AI가 우리의 노동을 100% 가져가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AI가 못하는 번거로운 노동은 늘어나면서 오히려 돈은 더 못 벌고 있다. (지금 취업 시장은 정말 좋지 않다.) 더 최악인 건 당분간은 빅테크의 AI 독점으로 경제적 양극화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과도기’가 끝난 후 진정 우리에게 노동의 자유가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내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에 계속해서 내가 아침에 일어날 이유 하나씩을 AI에게 외주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위기 의식을 느낀다.
몰입하지 않는 인간은 불행해진다
당신에게 아침에 일어날 이유는 무엇인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겐 몰입이라는 단어가 있다. Flow. 몰입의 영어 표현이다. 내 아이디이자 이 블로그 이름인 flowkater도 몰입하는 삶을 살고 싶은 내 의지의 표현이다.
군대 시절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 《몰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늘 몰입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몰입(flow)은 사람이 어떤 활동에 깊이 빠져 시간 감각이 바뀌고, 자기의식이 줄어들고, 행위와 인식이 하나처럼 느껴지는 최적 경험을 가리킨다. 중요한 건 flow가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 쉬우면 지루하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하다. 적절히 어렵고, 피드백이 분명하고, 목표가 선명할 때 사람은 깊게 들어간다. 그냥 편하게 누워 있을 땐 단 한번도 몰입은 오지 않았다. 늘 조금은 버거운 일에 매달려 있을 때에 왔다. 그리고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결국 그 몰입이 곧 행복이라는 얘기를 책에서 한다.
작년에 흥행한 영화 〈F1〉을 보았는가. (나는 매주 F1 경기를 라이브로 챙겨보는 F1 팬이다.) 주인공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분)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위험한 레이싱을 쫓으며 살아간다. 후반부에 그가 왜 아직도 레이싱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대충 이런 취지로 답한다. 한때 자기는 날고 있었고, 언젠가 그 순간을 다시 느끼기 위해 계속 레이싱을 한다고. 영화에서 그건 flying이라는 감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소니 헤이스는 마지막 한 바퀴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He’s flying. (이 대사와 장면은 제작에 참여한 7회 챔피언 루이스 해밀턴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하고, 그 말 또한 그가 존경하던 전설 아일톤 세나가 했다고 한다.) 소니 헤이스는 우승이나 명예나 돈이 아니라 바로 그 몰입의 순간, 지금 여기 머물고 있다는 감각, 살아있다는 감각을 다시 느끼려고 레이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닌다. 영화 중간중간 그는 돈이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고 침묵하는데, 그 몰입의 순간이야말로 그 대답이다.
그저 철없는 중년의 낭만을 그린 오락 영화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본다. 그냥 누워도 보고 아무것도 안하며 퍼져도 보고, 편하고 좋다는 건 어지간히 다 해봤는데 행복해지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 순간 무언가에 몰입하는 순간만이 나에게 행복을 줬다.
나는 개발자였다. 맞다. 나는 코드를 작성할 때 자주 몰입을 경험한다. 매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종이에 설계를 스케치하고 리스트업을 해둔 상태에서 내 아이디어가 실체를 갖춘 코드가 되어가는 과정, 적절한 난이도, 피드백(TDD/컴파일 결과), 명확한 달성 과제까지. 운이 좋으면 몇 시간 동안 그 몰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CTO로, 관리자로 몇 년간 일하면서 그 순간이 줄곧 그리웠다. 이전 회사에서 내가 정말 몰입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30분마다, 한 시간마다 잡혀 있는 미팅, 매일 바뀌는 업무,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결국 혼자서 무언가 만들어보려고 나온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다시 몰입하는 순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회사다니는 기간동안 가끔 엘리랑 워케이션을 갔다. 제주도로, 강원도로. 내 연차를 내고 우리만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자연 있는 숙소에서 3박 4일, 4박 5일을 대부분 코딩만 하다가 올라왔다. 내 능력부족으로 겨우 프로토타입 정도 만들고 오는게 최선인 일정이었다. 그저 놀고 먹고 쉬어도 아까운 시간에 굳이 그 돈과 시간을 쓴 이유가 뭘까. 그냥 놀고 먹고 쉰다고 행복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코드를 치는 감각, 직접 기획하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그 몰입은 쉽게 찾아오는 순간이 아니다.
아이러니한 건, 그 감각이 그리워서 다시 코더로 돌아왔는데 이미 코딩은 사람 손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거다. 내가 퇴사하기 두 달 전에 Claude Code가 런칭했다. 그래도 작년 10월까지만 해도 Claude Code나 Codex를 써도 내가 직접 코드를 보는 일이 더 많았는데, 작년 말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제는 내가 그 코드를 붙잡고 있는 게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고 생산성을 역행하는 순간이 와버렸다. 코드를 조금씩 작성하면서 테스트가 통과할 때까지 몰입하던 그 과정은 송두리째 AI에게 빼앗겼고, AI에게 일을 시켜놓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만 남았다. 관리자가 싫어서 코더로 돌아왔는데 다시 관리자 일로 돌아간 것이다.
덕분에 AI 에이전트에게 누구보다 일을 잘 시키는 역량은 이미 갖춰져 있다. 무엇을 인풋으로 주고 무엇을 확인해서 퀄리티를 검증해야 하는지, 관리자로 오래 일한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적어도 성과를 내야 하는 일에서는, 그 중간 과정에서 오는 몰입과 즐거움을 이제 영영 찾을 수 없게 됐다. 완전히 사라졌다.
거듭말하지만 코드를 직접 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나도 AI가 아니었으면 혼자서 백엔드부터 프론트엔드, 모바일 네이티브 앱까지 풀스택으로 만드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거다. 그리고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보다 당연히 프로덕트로 나오는 성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더는 AI를 내려놓을 수도 없다. 다만 다시는 그 과정에서 몰입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거다.
코딩만이 아니다. AI는 답을 너무 빨리 줘서, 내가 충분히 숙고하고 아이디어를 곱씹을 여유도 주지 않는다. 빈 노트에 스케치할 시간에 빨리 프롬프트를 넣고 프로토타입을 뽑아보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소라면 이상한 스케치나 하나 끄적이고 있을 시간에, 나는 이미 그럴듯한 프로토타입 하나를 만들어보고 있다. 그런데 공허하다. 이 모든 게. 그 과정에서 나는 몰입하지 못한다. 그저 프롬프트를 치고 AI가 답을 낼 때까지 딴짓을 하며 기다린다. 그렇게 공허하게 받아낸 정답은, 내가 아직 그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인정한다. 이게 내 능력 문제일 수도 있다. AI를 쓰고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제품을 빌드업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행복하지 않다.
20대에 사업가로 살아갈 때는 일이 아닌 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게 다 아깝게 느껴졌다. 청소, 집안일이 대표적으로 그랬고 회사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일이 그랬다. 나는 제품에 집중해야 하는 사람이니 온전히 거기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잡일들을 다 돈으로 샀다. 집안일도 청소 서비스를 구매했고, 회사에도 사람을 고용했고, 이동할 땐 늘 택시를 탔고, 운전도 하지 않았다. 다 시간 낭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우습다. 몰입하는 순간은 일에서만 오지 않는다. 청소할 때도, 빨래를 갤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세무 신고를 할 때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순간이 낭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글쎄, 그 시간이 온전히 나로서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요즘의 나는 오히려 그런 순간을 최대한 누리려고 한다. 그러려고 돈을 버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돈은 온전히 내가 몰입하며 쓸 수 있는 그 시간에 대한 비용인 셈이다.
물론 솔직히 잡일은 하기 싫을 때가 더 많고, 코드도 누가 빨리 대신 만들어줬으면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둘씩 돈으로, AI로 대체되어 갈 때 우리가 무언가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느껴야 할 그 행복을, 우리도 인생 어느순간 한번쯤은 소니 헤이스가 아부다비 그랑프리 파이널 랩에서 느낀 그 몰입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AI가 일자리를 가져가기 한참 전에 이미 조용히 가져가는 게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바로 이 몰입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걸 어디서 어떻게 되찾아야 하나.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르겠다. (다만, 헛소리라도 내 생각의 과정만큼은 빼앗기기 싫어서, 이렇게 비문을 쌓아가며 굳이 손으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오랜만에 나는 조금 몰입하고 있다.)
성장 기회 박탈
그런데 이게 나 혼자만의 문제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다. 똑똑한 주니어들이 종종 묻는다고. “AI만 쓰니까 제 실력이 안 쌓이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나는 그 질문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AI한테 물어보라고 답하는 프론티어들을 보며 답답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은 거다. 애초에 무엇을 질문할지 아는 것 자체가 실력인데 말이다. 이미 그걸 알고 AI에게 잘 질문하고 있다면 더이상 그 사람은 주니어가 아니다. 애초에 저 질문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AI 이전 시절에 올바른 질문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의 성장에 질문하는 대부분의 주니어에게 나도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다. 나조차도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주니어 시절이 딱 그랬다. 책을 읽어도 개념이 이해가 안되고, 스택오버플로우에서 라이브러리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 하고도 동작하는 그 로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썼다. 서버가 떨어지고 나서야 내가 작성했던 SQL 쿼리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았고 더이상 고칠수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클린 아키텍처와 도메인 주도 설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딪히고 떨어지며 하나씩 만들어가며 시점 시점마다의 답답함을 꽤 오랜시간 유지한채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순간에 이르렀다.
내가 성장하게 된 과정을 떠올려보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삽질이었다. 별것 아닌 버그를 반나절씩 붙잡고, 남이 짜둔 코드를 한 줄씩 더듬어 읽고, 아무도 안 읽을 문서를 쓰고, 지금이라면 한 시간이면 만들 화면 하나를 며칠씩 만들었다. 그 일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하찮아 보인다. 회사 입장에서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빨리 졸업했으면 하는 단계였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가진 감각의 대부분이 바로 그 하찮은 삽질에서 왔다. 반나절을 헤매고 나서야 찾아낸 게 결국 오타 하나였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 반나절 동안 로그를 어떤 순서로 의심해야 하는지가 손에 익었고, 무엇보다 내 코드를 못 믿는 법을 배웠다. 손으로 직접 부딪치면서 판단이 몸에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낮은 계단처럼 보이지만, 그 계단을 밟지 않고 위 계단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나는 아직도 모른다.
문제는 AI가 가장 먼저, 가장 깨끗하게 치워주는 게 정확히 그 낮은 계단이라는 거다. 작은 버그, 테스트 코드, 보일러플레이트, 단순 기능. 예전의 나라면 며칠을 끙끙댔을 일들을 AI는 몇 분 만에 끝낸다. 회사 입장에선 당연히 합리적이다. 사회 초년생을 일 년 동안 월급 주며 가르치는 것보다 Claude한테 시키는 게 싸고 빠르고 깔끔하다. (그 싸고 빠른 선택을 매일 하고 있는 게 바로 나다.) 누구도 악의가 없다. 다들 그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 합리적인 선택이 차곡차곡 쌓이면, 주니어가 들어와서 배울 자리 자체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만들어졌던 바로 그 자리가 사라진다.
이게 그냥 내 불안한 상상만은 아니다. 작년 스탠퍼드 연구진이 미국의 거대한 급여 데이터를 들여다봤더니, AI에 많이 노출된 직군에서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젊은 축의 고용이 눈에 띄게 꺾여 있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정점 대비 거의 20%가 빠졌다.(희망을 가지자, 아직은 80%나 있다.) 재밌는 건 같은 직군의 경력자들은 멀쩡했다는 거다. 오히려 늘기도 했다. AI는 시니어를 대체하지 않았고, 시니어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자리를 먼저 먹어버렸다. 물론 이걸 전부 AI 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 시기엔 금리도 경기도 채용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연구자들 스스로도 다른 요인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덴마크에서는 같은 신호가 보이지 않았다는 반박도 있다. (한국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아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니 ‘성장 기회 박탈’이라는 제목이 좀 과하긴 하다. (성장 기회 감소? 음, 글 맛이 안난다.)
이유를 짐작해보면 더 씁쓸하다. AI가 잘 베끼는 건 책과 문서로 배울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이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주니어가 시장에 들고 나올 수 있는 전부다. 경력자들이 파는 건 다르다. 수천 번의 삽질 끝에 몸에 눌어붙어서 본인도 말로 설명 못 하는 감각. AI는 아직 그걸 잘 못 베낀다. 그러니까 대체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곳이 하필 입구라는 거다.
앞에서 고백한 면접 얘기를 다시 꺼내야겠다. 나는 한때 풀스택을 한다는 지원자를 깊이가 없다고 걸러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혼자 풀스택을 한다. 그때의 나는 우습지만, 적어도 그때는 깊이라는 게 어디서 오는지는 알았다. 느리게, 직접, 삽질하면서 온다는 걸. 지금의 나는 그 삽질을 죄다 AI에게 넘겨버린 사람이고, 그래서 주니어에게 삽질을 권할 염치가 점점 없어진다.
최근에 주니어들을 멘토링하면서 요즘 부쩍 느낀다. 예전의 멘토링은 정답을 알려주고 싶은 입을 꾹 참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스스로 헤매다 도착해야 그게 그 사람 것이 되니까. 그런데 요즘은 내가 참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입을 다물어도 옆에서 Claude가 답을 준다. 그것이 옳은 질문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들이 헤맬 기회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거다. 그 헤맴이 사실은 수련의 전부였다.
나 혼자 고작 몰입할 시간을 잃었다는 사치를 부릴때, 실제 사회는 성장의 사다리가 점점 줄어든다. AI의 성장 속도는 인간의 성장을 기다려줄만큼 느리지 않다. 그리고 모든 회사가 사람을 더 고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일 만큼 성장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누군가에겐 AI 하나로 그 어떤 제약도 없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행운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오너십을 가지고 일해야하는 세상이지만 모두가 오너가 될수는 없다. 결국 이렇게 서서히 사회 성장의 큰 밑받침을 제공해주는 다음 세대의 시니어들이 AI로 인해 사라지는게 아닐까? AI 네이티브라고 칭할 수 있는 선택된 능력의 소수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게 정말 우리 모두에게 좋은 미래일까? (일단 주니어 시절의 내가 지금의 시대를 마주한다면 나는 과연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필로그
물론 주니어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해가 같은 방식으로 얇아지고 있다. 검색의 시대에 우리는 적어도 헤맸다. 링크를 열 개쯤 열고, 그중 아홉 개가 쓰레기고, 서로 말이 다른 두 개를 붙들고 뭐가 맞는지 가늠하고. 그 과정은 짜증났지만, 그 짜증의 부산물로 지도가 머리에 남았다. AI는 그 헤맴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버린다. 답은 더 정확해졌는데, 나는 헤매본 적이 없다. 매끄러움이 망설임을 지운다. 앞에서 인지 부채라고 불렀던 그 청구서가, 이제 나 하나가 아니라 사회 단위로 쌓이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이상한 상상을 하나 해보자. 내일 아침, 세상의 GPU가 전부 멈춘다면.
미리 말해두는데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는 얘기가 아니다. 데이터센터에 불이 나든, 해저 케이블이 끊기든,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의 반도체를 틀어막든, 이유는 뭐든 좋다. (지난달 미국이 Fable 5를 잠깐 막아 세우고 GPT-5.6을 정부 승인제로 바꾼 순간, 이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상상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은 풀렸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 날 아침이다. 과제를 내야 하는 학생은 그날 뭘 할 수 있을까. 보고서를 내야 하는 직장인은. 그리고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내 코드부터, 나는 이제 AI 없이 읽어 내려갈 자신이 없다.
웃자고 하는 얘기 같지만, 항공업계는 이 문제를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동조종이 보편화된 뒤 조종사들의 수동 비행 감각이 무뎌졌고, 정작 자동화가 꺼진 비상 상황에서 사람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고들이 보고됐다. 자동화 덕분에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해졌는데도, 일부러 자동화를 끄고 손으로 모는 훈련을 시킨다. 만에 하나 일어나는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여전히 그렇게 훈련된 파일럿은 아직까지 필수다. 런던의 택시 기사들은 도시 전체의 길을 외우는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뇌에서 공간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가 커진다는 연구로 유명한데, 뒤집어 말하면 GPS에 길을 맡긴 우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GPS에 의존할수록 공간 기억이 무뎌진다는 상관을 본 연구도 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다. 애초에 그 GPU조차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는,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를 빌려 쓰는 처지다. (오케스트레이터라는 멋진 직함도 결국 남의 데이터센터를 빌려야 성립한다.)
그러니까 진짜 공포는 AI가 너무 강해지는 게 아니라, AI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너무 약해져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지자는 입자가속기라도 교란해야 했다.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없다. 우리가 알아서 손을 놓았으니까.
그런데 《삼체》에는 지자에 맞서는 인류의 마지막 무기가 하나 나온다. 면벽자(面壁者)다. 지자는 모든 것을 본다. 모든 대화를 듣고, 모든 문서를 읽고, 모든 실험을 들여다본다. 딱 하나, 인간의 머릿속만은 못 본다. 그래서 인류는 네 사람을 뽑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문서로도 남기지 마라. 오직 머릿속에서만 굴려라. 벽을 마주 보고 생각하라. 면벽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면벽자의 주된 스토리인 삼체 2부는 3부작 중 특히 걸작이다.)
나는 이 설정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모든 대화와 문서와 실험을 제 발로 지자(AI)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나. 재밌는 건 세상이 벌써 안 보여주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AI가 과제를 다 써주는 시대가 되자, 대학들이 수백 년 전의 시험 방식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 구술시험이다. 노트도 화면도 없이, 교수 앞에서 자기 입으로 설명하는 것. 네 머릿속에 정말 들어 있는지를 보겠다는 거다. AI 때문에 구술시험이라니. 가장 첨단의 기술 앞에서 가장 오래된 시험이 부활하고 있다. (나부터 떨어질 자신이 있다.)
AI 시대의 면벽자는 AI를 안 쓰는 사람이 아니다. AI가 들어오지 못하는 생각의 방을 하나쯤 남겨둔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방을 몇 개 남기기로 했다. 오해는 말자. AI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AI에게 내가 좋아하던 인간의 부분까지 넘겨주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내일도 AI에게 일을 시킬 거고, 그 사이 어디쯤, 0과 1 사이의 0.x 어디쯤에 서 있을 거다. 거창한 계명 같은 걸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걸 지킬 수 있는 인간이 못 되고, 이건 잘 지켜서 자랑하는 규칙이 아니라 자꾸 무너져서 세워둔 난간이니까. 세 개만 적는다.
하나. 생각의 첫 스케치는 손으로 한다. 프롬프트를 열기 전에, 그 난해한 현대 미술을 먼저 그린다. AI는 그다음이다.
둘. 일주일에 하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AI 없이 끝까지 만든다. 글이든 코드든. 느리고 형편없어도, 그건 내 것이다. (아마 코드보다는 대부분 글쓰기가 될 것이다.)
셋. 읽고 또 읽는다. AI 시대에는 오직 읽고 사고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 난간을 세우는 과정은 AI에게 도움을 받아도 좋다. 적과의 동침.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일이라면.)
글 처음에 물었다. 이미 우리에게 지자가 온 건 아닐까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답해야겠다. 그렇다, 나는 지자가 이미 도착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소설과 다른 게 하나 있다. 소설의 지자는 적의를 품고 왔지만, 우리의 지자는 편의를 들고 왔다. 아무것도 막지 않는다. 오히려 다 해준다. 그리고 그 “다 해준다”가, 우리가 더 깊이 알아내는 길과 더 깊이 살아갈 이유를 조용히 하나씩 없애고 있다.
지자(AI)는 끝내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총성도 침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몰입하던 자리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하나씩 뺏어갈 뿐이다.
AI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나는 모른다. 이 글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도 답 대신 질문으로 마무리 하는게 정직하겠다. 당신에게, 그리고 오늘 밤에도 AI에게 일을 시켜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나에게 묻는다.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참고 자료
책
- 류츠신, 《삼체》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가짜 노동》
-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 리처드 세넷, 《장인》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Flow》
- 마리 야호다, 《Employment and Unemployment》 (1982)
기사·연구
- 진짜 모네를 AI라고 올린 X 퍼포먼스 (Futurism)
- 보리스 엘다그젠,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 어워드 수상 거부 (BBC)
- AI 라벨이 그림 평가에 미치는 부정 편향 (Grassini & Koivisto, 2024, Scientific Reports)
- Your Brain on ChatGPT: 인지 부채 연구 (MIT Media Lab, 2025)
- 이키가이와 사망률, Ohsaki Study (Sone et al., 2008)
- 복권 당첨자와 행복 (Brickman, Coates & Janoff-Bulman, 1978)
- Canaries in the Coal Mine: AI와 초기 커리어 고용 (Brynjolfsson, Chandar & Chen, 2025, Stanford Digital Economy Lab)
- Humlum & Vestergaard (2025), Large Language Models, Small Labor Market Effects (덴마크 반례)
- 자동화 자만과 파일럿 탈숙련 (MITRE, Lessons Lost)
- 런던 택시기사의 해마 (Maguire et al., 2000, PNAS)
- GPS 의존과 공간 기억 (Dahmani & Bohbot, 2020, Scientific Reports)
- AI 시대 대학의 구술시험 부활 (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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