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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면도날'을 읽고 (욕망이 곧 운명이 되는 사람들)

by Tony Cho
8분

핵심 요약

가족 휴가 비행기에서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었다. 구도자 래리는 《싯다르타》를 닮았지만, 정작 내가 느낀 주제는 '사람은 자기가 깊이 원한 것 쪽으로 끌려가며 그 욕망의 형태가 곧 운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좇을 수 없는 래리의 삶,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계속 사랑하려는 이사벨, 사교계의 인정에 매달리다 쓸쓸히 죽는 엘리엇. 100년 전 대공황기의 이야기가 지금과 정확히 겹치는 이유와, 비생산적인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래리가 건네는 위로까지 적었다.

면도날 (서머싯 몸, 안진환 옮김, 민음사)

들어가며

이번 가족 휴가 때 비행 시간이 좀 있어서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골랐다.

어릴 때 《달과 6펜스》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책을 펼쳤는데, 처음엔 이야기의 서술 방식이 당황스러웠다. 화자는 서머싯 몸 본인이며, 마치 실제 겪은 일처럼 회고하듯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이 래리라는 인물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은 래리를 포함해 래리가 부재할 때 래리를 이야기하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일종의 군상극에 가깝다.

서술 방식과 구조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책 자체는 굉장히 몰입이 되어서 여행 내내 재밌게 다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닮은 구도자의 길을 가는 래리, 그를 사랑하는 이사벨, 어린 시절 친구 소피, 사교계의 스타 엘리엇, 그리고 이들을 관찰하며 회고하는 화자 본인까지 모두가 주인공이다.

래리와 직접 연결된 이 인물들이 저마다 래리와 맺은 인연과 관계, 그리고 래리를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소설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 래리

싯다르타를 닮은 래리의 모습을 보며 구도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오히려 내가 느낀 주제는 최근에 읽었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와 더 가까웠다. 이 소설을 내 식대로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사람은 자기가 깊이 원한 것 쪽으로 끌려가며, 그 욕망의 형태가 곧 운명이 된다.

래리는 전쟁에 조종사로 참전한 뒤, 눈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악과 신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렇게 래리는 안정된 삶과 좋은 직업을 뒤로하고 답을 찾아 떠난다. 정작 그가 무엇을 찾는지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가 뭔가를 찾고 있는데 그게 뭔지 자신도 모르는 게 아닐까? 아니면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 오로지 수학적인 계산상으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별을 천문학자가 찾는 것처럼.

래리 본인의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거대하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좇을 수 없는 삶, 전할 수 없는 깨달음

래리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고, 화자를 포함한 모두가 그의 매력에 매료된다. 언뜻 래리를 보며 나도 저런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는 싯다르타가 보여준 구도자의 길과 깨달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심 인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좇을 수 없는 삶이자, 자기 깨달음만큼 타인의 깨달음은 이끌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혼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도 나는 그에게 연민이 일었다.

싯다르타가 결국 자기 아들로 인해 마지막 위기를 겪듯, 래리 또한 소피에게, 나아가 자기 삶 말고는 다른 무엇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구도자 같은 삶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래리처럼 하루아침에 일을 관두고 인도로 떠날 수 없으며, 그 역시 신과 악에 대한 질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그 욕망에 충실했던 인물일 뿐이다.

래리가 인도에서 붙잡은 답은 이런 것이었다.

실재라고 할까요? (…) 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브라만이라고 부르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만물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만물이 의존하는 대상 (…) 전체이자 부분이고 유한하면서 무한한 존재예요.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구원의 수단은 단연 인식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죠.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이니까요.

하지만 《싯다르타》에서도 마지막에 고빈다를 통해 깨달음을 전하려다 결국 실패하듯, 래리는 자기 확신과는 별개로 그것을 타인에게 전하지 못한다. 소피의 비극을 직접 불러일으킨 인물은 이사벨이지만, 이사벨에게 그녀만의 방식이 있듯 소피는 절대 래리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소피는 래리를 아예 몰랐다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래리가 안정된 삶과 약혼자를 버리고 답을 찾아 떠나듯, 나도 이전 회사를 퇴사하며 안정적인 경제적 대가를 포기하고 지금 내 길을 찾는 중이다. 진짜 고객에게 진정한 가치를 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일하는 과정에서 다시 몰입하고 싶었다. 고객의 피드백은 느끼지도 못한 채 투자금과 정부 사업에만 몇 년을 매달리던 시간, 관리자로 살면서 무엇 하나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지 못하던 그 시간이 나에겐 낭비처럼 느껴졌다. 인도로 떠나진 못해도, 나 역시 내 방식대로 그 욕망을 좇아 걷고 있는 셈이다.


이사벨, 내려놓지 못하는 대가

이사벨은 래리를 사랑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해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래리를 사랑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한 집착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한다. 소설 속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 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런저런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독하게 괴로워하면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해.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면 놀라게 될걸.

사랑은 항해에 서투르기 때문에 바다에 나서면 약해지지. 이사벨과 래리 사이에 대서양이 놓이게 되면, 배를 타기 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아픔도 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거야.

떨어져 있으면 그 아픔조차 보잘것없어진다는 조언이지만, 이사벨은 그렇게 사랑을 흘려보내려 하지 않는다.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그 사랑을 계속 붙들고 싶어 한다. 그 대가는 그녀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녀의 선택도 우리는 선뜻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인생에서 종종 어떤 선택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미련을 가진다. 결국 그 미련과 집착으로 (이미 그건 내 것이 아닌데) 우리는 실수하고 망가질 수도 있다. (최근에 본 드라마 〈맨끝줄소년〉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사벨은 우리가 보통의 인간으로서 지닌 욕망을 그대로 담아낸 인물이라, 공감과 혐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사벨의 미련이 나에겐 남 얘기 같지 않았다. 퇴사하고 한동안은 나도 회사에서 쥐고 있던 관계와 인정, 직함을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이미 내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 미련 때문에 엘리와 새로 합을 맞추던 초반에도 삐걱거림이 많았다.

소설 속 누군가는 그런 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엘리엇의 쓸쓸한 죽음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 중심이 되는 인물이지만, 마지막 그의 쓸쓸한 죽음(거의 한 장을 통째로 할애해 묘사되는)은 지금 우리가 SNS에서 관심을 좇고 사회의 인정을 갈구하며 시절 인연에 집착하다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허황된 가치에 매몰된, 못나고 우스운 인물로만 그리기엔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결국 화자 본인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으니 진정한 친구 한 명은 만들고 간 셈이 아닌가 싶다.

사실 엘리엇을 보며 가장 뜨끔했던 건 나였다. 회사에 있을 때 나도 팀원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리더가 되고 싶었고, 떠난 뒤에도 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홀로 쓸쓸히 떠나는 엘리엇이 그토록 깊이 공감됐던 건, 나 역시 그 인정 욕망에 매달리며 이미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게 집착이고 이 긴 인생에서 스쳐 가는 시절 인연이라는 걸 알 만큼 우리는 지혜롭지만, 삶의 모든 순간마다 그 앎을 실천할 만큼 충분히 지혜롭지는 못하다. 그러니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회에서 사랑받고 싶다는 내 욕망 그 자체는 인정하되, 그 욕망에 삶이 통째로 끌려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100년 전, 그리고 지금

이 소설의 배경은 정확히 100년 전,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대공황 시절이지만,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이 100년 뒤인 지금과 아주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래리는 전쟁에 조종사로 참전한 뒤 타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악과 신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탐구심 끝에 결국 구도자의 삶으로 떠난다. 전쟁이 그에게 남겼을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배경이다.

최근 이 책과 더불어 《싯다르타》 같은 책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지금 시대의 불안과 혼란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코로나부터 시작하여 전쟁, 국내외 정치부터 경제까지 양극화되는 사회, 모든 게 빨라지고 정보가 넘치지만 내가 무얼 원하는지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런 시대에, 래리의 이야기는, 자기 영혼에 귀 기울여 택한 선택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현실을 (그 한계까지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여전히 일관되게 묘사되는, 등장인물 모두가 매료되는 그의 매력적인 모습은, 스스로의 영혼에 충실한 사람이 또한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를 말해준다.

또한 화자의 섬세한 인물 묘사와 흥미진진한 전달 방식 덕분인지, 마치 그들이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인 것만 같고, 지금도 어딘가 있을 법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저자이자 화자인 서머싯 몸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다.)


나가며

래리처럼 구도자의 길을 살 필요는 없다. 다만 내 욕망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것도 저것도 놓치기 싫어서 그저 삶을 망설이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이미 다른 선택을 해놓고 치러야 할 대가를 외면하며 일을 그르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런 질문을 품게 됐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내 영혼의 방향과 같은가, 아니면 단지 타인이 이해하기 쉬운 방향인가?

래리가 유럽과 인도를 떠돌며 얻은 결론도 결국 거창한 초월이 아니라, 다시 사람들 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책 마지막 해설에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소설적 정황과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어찌 보면 래리는 ‘달의 세계’와, 엘리엇이나 이사벨은 ‘6펜스의 세계’와 오버랩된다. 래리는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유럽 각지와 인도 등을 돌아다니며 여러 종교와 철학을 두루 접한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사회 속에서, 자기와 같은 (또는 같지 않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그저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내면에는 대중의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세계관이 아니라 그만의 실존적인 해답(비록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이 똬리를 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서머싯 몸의 두 소설이 결국 나에게 던지는 질문도 하나였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서비스를 만들면서 요즘 뼈저리게 깨닫는 게 있다. 사업은 결국 빌드업보다 마케팅과 영업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그걸 미룬 대가까지 지금 함께 치르는 중이다), 그저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절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 무언가를 진짜 원한다면, 어디선가는 반드시 그 값을 지불하게 되어 있다.

래리가 마지막에 얻은 깨달음의 결론은 사실 크게 대단한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삶이 결론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추진력을 얻기 위한 과정인지, 아니면 그저 미끄러져 가는 과정인지는 결론에 다다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타인의 기대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계속 탐색하고 탐구하며 이 길을 걷는 지금 이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이니까.

그러니 딱히 생산적이지 않은 시기를 지나며 마음이 불안한 누군가가 있다면, 래리를 통해 조금은 위로받아도 좋겠다. 목표를 좇기보다 빈둥거리며 비생산적으로 흘려보내는 것만 같은 이 시간이, 어쩌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고민하는,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시간, 몰입, 내가 서비스를 만들면서 추구하는 고객 가치, 그리고 진정 같이 일하는 사람과 목표에 정렬되어 승리할 때까지 나아가는 팀워크까지. 나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내 본모습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계속 고군분투해보자.

제목 《면도날》은 《카타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 왔다.

날카로운 면도칼의 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추가로 밑줄 친 문장

“먼 훗날 사람들이 좀 더 커다란 통찰력을 얻게 되면, 결국 자신의 영혼에서 위안과 용기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대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잔인한 신들에 대한 기억의 잔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드바이타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죠. 그저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렬한 열망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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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Tony Cho

Indie Hacker, Product Engineer, and Writer

제품을 만들고 회고를 남기는 개발자. AI 코딩, 에이전트 워크플로우, 스타트업 제품 개발, 팀 빌딩과 리더십에 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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