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3분기에는 소위 “전투적”으로 책을 읽었다. 특히 9월 들어서 하루 독서 시간이 4시간이 넘은 경우도 자주 있었다. 나는 소위 “병렬”독서가로 이 책 저 책 펼치기 시작해서 최대 하루에 7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도 했다. 다행인 점은 그렇게 펼쳐놓은 책들 중 한두 권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완독을 했다는 것. 이제 코딩은 AI가 대신하니 반쯤은 아마추어 “독서가”를 직업인으로 삼아 볼 만하다. 물론 아직도 더 많이, 더 빨리 읽지 못해 안타깝다.
단순히 취미적인 독서 생활에서 온라인 독서모임을 준비하다 보니 정말 잘 읽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 욕심 속에서 치열하게 독서를 진행했다.
독서를 하다 보니 결국 또 그걸 나의 저작 활동으로 환원해야 함이 나의 시간 단위당 가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정의로운(?) 방향이나 읽고 싶은 책이 많아 게으름을 핑계로 (개발자들을 위한) 블로그 글 저작 활동을 자주 하지 못했다. 책 리뷰를 빼면 2개의 포스트만 작성을 했으니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개발자로서 에고를 이미 내려놓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개발자들에게 계몽을 촉구하는 식의 글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그들에게도 일종의 폭력으로 나에게도 죄책감으로 되돌아오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내 입장에서 거시적 흐름과 장기적인 목표를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당장 현생의 취업과 이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다수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실패를 계속 지켜보고 있기에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 일에 더 집중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아프다. 이건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니 언젠가 내 마음이 동하면 다른 글에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보겠다.
중도에 내려놓은 책을 제외하고 완독을 기준으로 하면 7월에 6권, 8월에 13권, 9월에 22권, 즉 3분기 동안 41권의 책을 읽었는데 모든 책이 모두에게 좋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과정 속에서 모두 얻는 것이 있었다. 책을 읽는 중에도, 읽고 나서도 열심히 감상과 메모를 남겼으나 이 글에서는 그냥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 각 책의 짧은 감상을 위주로 남겨보겠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2분기 글에서 이미 다뤄 이번 목록에서는 제외했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1·2권을 각각 한 권으로 세되 감상은 함께 묶었다.
해당 글은 41권의 책을 최대한 완독한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고 이전에 비해 권수도 많아져서 각 책을 주제별로 나누어서 가이드를 하니 관심 있는 주제 또는 책만 읽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활용해라.
분류 및 차례
- 소설·문학
- 철학 입문
- AI 시대, 독서에 관하여
- 기타
- 과학
「면도날」 - 서머싯 몸
올해 고전 세계문학전집 입문은 「싯다르타」였지만 고전이라는 고루한 카테고리는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재밌는 작가를 뽑으라면 서머싯 몸이겠다. 어릴 적 읽었던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나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더 선호한다. 면도날은 이야기꾼 서머싯 몸의 장점이 극대화되는 작품 중 하나이고 래리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여러 주인공들이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관계와 스토리, 그들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와 욕망들을 보며 소설 속 100년 전의 인물들이지만 지금 현대의 인물들과 별다를 바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것 같다.
자세한 후기는 이전 포스트에 남겼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런저런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독하게 괴로워하면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해.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면 놀라게 될걸.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뉴필로소퍼 vol.35」 - 뉴필로소퍼 편집부
3분기는 고전과 철학 입문(한참 멀었으니 입문도 아닌 그냥 시작이라고 하자)으로 내 독서 활동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뉴필로소퍼」는 내가 처음으로 정기 구독하고 있는 철학 잡지이다. 짧게나마 철학을 다루는 책들을 읽어보니 해당 철학은 결국 해당 철학자의 역사와 그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정신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반대로 그걸 이해하면 지금의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기별로 오는 이 잡지에는 디지털과 AI, 현대인의 삶의 문제를 다양한 철학적 관점에서 다룬 국내외 집필진의 글들이 실려 있다. 쉽고 나눠서 읽기에도 좋고 또 잊을 만하면 매거진이 배송되니 또 어떤 주제를 만날지 기대되는 부분도 있다.
인간은 ‘나’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아렌트는 나와 타인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곳, 인간들이 연대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관계의 공간을 “사이(In-between)”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서로 만나 소통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지고 공동체도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젓가락 역시 마주 본 두 짝이 접점을 찾고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낼 때 음식을 집어 올릴 수 있고, 막대기들의 반복적 만남이 우리의 건강을 유지시킨다. 젓가락들은 서로 기대 산다. 인간이 서로 기댐으로써 비로소 삶을 지탱하듯이.
타인을 볼 때도 곧잘 연속적 관점을 취합니다. 특히 타인을 자아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이득이 된다, 저 사람은 내 취향에 맞는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내 세계의 일부, 나의 도구, 나의 평가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런 시각을 가리켜“동일자의 제국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타인과 나 사이에 놓인 절대적인 다름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고, 타인을 나 한 명의 시각을 통해 획일적으로 포획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복합적이긴 하나 시대마다 악을 권할 때가, 혹은 선을 권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 시대의 욕망은 사람들에게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마치 인간이 애초에 가지고 있는 선한 기질들이 잘못됐다고 주문을 거는 것만 같아요. 저는 이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중독」 - 카르스텐 C. 셰르물리
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조직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그리고 그 책임자 즉, 권력자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 것이다. 권력이라고 하면 보통 정치적 권력으로 치환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걸 포함해서 책에서 권력은 사람이 둘 이상이면 무조건 나타나는, 거스를 수 없는 역학이라고 설명한다. 즉, 모든 인간관계에서 권력은 형성되며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모든 인간은 거기에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건 엘리와의 관계(일하는 관계이든 부부 관계이든)에서도 이런 부분에 경각심을 느껴 나 스스로 권력중독에 대한 경계와 메타인지를 위해서 책을 선택했다.
책을 읽은 효과는 명확하게 있었다. 엘리와 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권력과 권력 역전 그리고 권력 중독의 증상을 우리 둘 스스로가 상황마다 메타인지하고 상황을 가볍게 만드려고 노력함으로써 분명 이전보다는 많이 개선된 부분을 느낀다. 역시 유머는 항상 승리한다.
권력과 더불어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지위나 위계, 서열 같은 개념들이 일상에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모든 상호작용은 크고 작은 권력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든, 어떤 조직에 들어가든(실제 공간이든 온라인이든) 우리는 언제나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권력의 부작용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아’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누구나 권력의 그림자에 노출될 수 있다. 또한 다른 권력자의 반사회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성격 탓이라고 단정해버리면서, 정작 자신의 경우는 ‘상황 탓’으로 돌리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물론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권력에 덜 휘둘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권력자에게는 권력이 가진 부작용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사람은 권력자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권력이 만들어낸 왜곡된 세계가 아닌 현실의 감각을 되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기 충동을 잘 억누르지 않게 되고, 권력에 중독되어 빠져든다. 권력은 각성제를 맞은 것처럼 사람을 고양시키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변한다. 사고방식도, 행동도, 심지어 내면의 심리까지 달라진다. 한 번 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경우 더 많은 권력을 탐한다.
「피를 마시는 새 5: 발케네의 주인」 - 이영도
1분기부터 읽고 있던 이영도 장편 소설. 5권부터 본격적으로 2부가 시작되는데 사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만큼 몰입해서 읽지는 못하고 있다. 이번 분기에 5권을 읽고 중단한 게 그 증상이지 않나 싶다. 물론 여전히 레콘과 도깨비, 인간과 나가의 세상에서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역사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 들어서 그런가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게 느껴진다. 그냥 「눈물을 마시는 새」를 한 번 더 읽는 게 나을까.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피를 마시는 새는 꼭 전권 완독을 할 예정이다.
“인간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항상 뭐가 목적이고 뭐가 수단인지 헷갈리게 되더라고. 그래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아.”
선택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자가 남을 지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다는 식의 착각을 만들어 냅니다.
질박하다면 명쾌해야겠지만 지나친 질박함 때문에 명쾌함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독서라는 사건」 - 밀리의서재·정유라
밀리의 서재 10주년으로 나온 기념 책이다.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AI 시대의 읽기라는 행위에 대한 가벼운 고찰과 2부에는 책이라는 시장에 참여하는 여러 현업 종사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밀리의 서재라는 전자책 구독 플랫폼을 직접 운영하며 희소해지는 독서라는 인간의 활동에 대한 의의를 다시 찾고 왜 우리는 읽어야 하는지 그들 스스로에게도 사용자들에게도 설득하기 위해 작성한 책이다.
현업 종사자들이 추천하는 많은 책들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읽게 된 책도 있고 나도 이 시점 전후로 밀리의 서재를 구독해서 책을 읽고 있으니 효과는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인간의 지능이 걱정될 때 찾을 아주 완벽한 발명품을 이미 알고 있다. 책이다. 운동이 잃어버린 신체 활동을 되찾는 현대인의 생존 훈련이라면 독서는 잃어버린 사고 활동을 되찾는 새로운 생존 훈련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 안에 있는 어떤 문장이 나에게 와닿을지는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하잖아요. 내가 간직하고 싶은 문장, 나와 딱 맞아떨어지며 공명하는 부분은 책 전체를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죠.
독서와 독자의 접촉점이 일상 전체로 퍼졌고, 접촉이 잦아지면서 책과의 관계가 깊어졌다. 책과 자주 만날수록 독자는 변화할 계기를 얻는다. 수시로 삶에 끼어드는 독서는 한 사람을 서서히 바꿔놓는다. 그들은 더 많이 질문하고, 더 자주 기록하며 책을 자기 삶 안으로 완전히 끌고 들어온다. 읽은 것을 냉동시키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온도에 맞춰 꺼내 쓴다.
「지능 파산」 - 한소원
뉴필로소퍼를 배포하는 바다출판사에서 온 알림으로 구매한 책.
AI 시대의 실존적 위기와 대응책을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했다. 내가 이전에 썼던 「AI가 일자리보다 먼저 빼앗는 것」이라는 글과도 맞닿아 있다.
내가 종사했던 에듀테크 분야에 대한 비판적 시각, 아이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이나 문해력 문제 등 세대별 IQ 점수 변화에 대한 저자의 문제 제기부터 미래에 예상되는 위협에 대한 고민들이 꽤 자세하게 설명되는데 나도 나지만 만약 AI 시대에 미래의 아이 교육에 대한 걱정이 있는 사람에게도 필히 추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육의 디지털 전환과 에듀테크를 옹호하는 주장은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AI가 개인 맞춤형 피드백을 제공하고, 교사의 부족을 메우며, 취약 지역의 교육 접근성을 높여 교육의 혁신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맞춤형 피드백만 제공되면 학습에 도움이 되는지, AI 의존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기술은 그냥 등장했고, 효과에 대한 검증도 없이 학교에 도입되었다.
디지털 기기가 주는 편리함은 뇌의 깊은 사고 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 디지털 기기에 연연하지 않는 학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뇌의 작동 방식에 맞는 학습 도구를 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화면은 훑어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결국 내가 AI를 도구로 써도 되는 단계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AI 없이도 이 작업의 핵심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근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AI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지적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이들이 훗날 AI를 주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AI 없이 단단한 인지적 기초를 먼저 다져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AI 리터러시는 남들이 AI를 쓰는 만큼 나도 AI를 쓸 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술을 활용해서 나를 성장시키고, 더 높은 수준의 성취를 만들기 위해 AI를 사용하는 것이 AI 리터러시다.
「사고외주」 - 홍진기
위 「지능 파산」을 업무의 관점에서 짧게 다시 읽는 느낌의 책.
1시간 정도면 다 읽는 분량이라 AI 시대에 내가 하는 일 모두를 AI에게 위임하며 생각하는 행위까지 AI에게 외주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가볍게 읽기에 좋지만 지능 파산에 비교하면 현상은 짚지만 딱히 와닿는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생깁니다. AI가 만들어준 결과를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구조를 짜는 일, 전제를 점검하는 일, 논리를 세우는 일, 그리고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점점 귀찮아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안도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사람이 사고를 넘길 때 느끼는 편안함은 실제로는 불안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불안을 잠시 미뤄두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을 지금 이 순간에는 직면하지 않겠다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책임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사고를 넘기는 행위는 그래서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피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방어 기제에 가깝습니다. AI는 이 욕망을 매우 정확하게 충족시켜줍니다.
결과를 자기 힘으로 떠받치는 감각은 약해진 상태. 저는 이것을 우리가 마주한 ‘똑똑한 무능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답은 손에 쥐었지만 왜 그 답이 나왔는지를 끝까지 설명할 자기만의 언어를 잃어버린 상태 말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면도날」에 이은 두 번째 세계문학전집. 엘리랑 같이 책을 읽고 싶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랜덤하게 고른 책으로 우리 둘이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입덕하게 된 첫 책이다.
영국 집사 스티븐스가 말년에 영국 로드 트립을 하며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책인데 화자의 심리를 아주 섬세하게 풀어내는 가즈오 이시구로만의 문체로 참 재밌게 읽었다.
엘리랑 책을 읽고 나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회사(조직/국가)에서 시켜서 한다”, “어쩔 수 없잖아, 먹고 살려면 해야지”라는 대사로 우리는 우리의 불편한 선택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기기만이며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게 해준 작품이다.
물론 나는 그런 문제들이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중대한 업무상의 이유, 다시 말해 현재 달링턴 홀에 직면한 직원 문제만 아니었다면 그런 부분을 파고들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어쨌거나 켄턴 양은 그러한 문제들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듯했고, 나는 그것을 지난날에 우리가 맺었던 업무상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긴 세월 그분을 모시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 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읽지 않는 사람들」 - 나오미 배런
원제는 「Reader Bot」인데, 「사고외주」, 「지능 파산」, 「독서라는 사건」과 함께 AI 시대에 우리는 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서의 장점을 나열하면서도 현실적으로 AI와 합쳐져 버린 이 세계선에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들어가 있는 책.
특히 AI 사용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비유하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모든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읽기 즉, 독서라는 행위를 왜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역설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효율성이나 게으름을 이유로 읽기와 쓰기, 그림 그리기와 작곡 같은 인간의 정신적·창의적 노력을 AI에 넘겨주는 일일 수도 있다. 여기서 ‘넘겨준다’라는 표현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 말에는 우리를 대신해 놀라운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기술을 앞에 두고 개인이나 사회는 어떤 종류의 파트너십을 맺고자 하는지를 먼저 파악해야만 한다는 도전적인 과제가 담겨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우려는 남는다. 요약이나 분석을 위해 무언가에(심지어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면, 직접 읽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데이터나 주장을 놓칠 위험이 있지 않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까? 오직 자신만이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내용이 빠지게 되지는 않을까?
정신적 에너지는 다른 말로 정신적 노력이다. 이 책에서 ‘노력’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 사용됐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다. 이유가 있다. 생각하는 것도 일이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읽기는 다른 읽기보다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런 읽기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르기를 바란다. AI는 읽기는 물론 수많은 다른 작업에서도 우리의 인지적 노력을 더는 쪽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이 ‘덜기’에는 그만한 위험이 따른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 이동진
이동진은 직업인으로서 영화평론가이지만 취미인으로서 어마어마한 다독가이다. 1년에 몇백 권은 족히 읽는 듯하고 그의 인문학적 백그라운드는 항상 그의 인터뷰를 들을 때마다 감탄한다.
독서에 대한 그의 사유, 인터뷰를 담아낸 아주 짧은 책이라서 가볍게 읽기 좋다. 신성시되는 독서를 조금은 쾌락의 관점에서 가벼운 관점으로 접근해서 가끔 독서 권태기가 온다면 쉬어가는 타이밍에 읽어보면 좋을 책.
특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취향은 사실 교양이고 교양은 훈련을 통해서 계발된다는 부분은 내가 지금 독서를 하는데 있어서 여러 좋은 마인드셋을 만들어준 문장이었다.
저는 쾌락은 일회적이라고, 행복은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쾌락은 크고 강렬한 것, 행복은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에 있는 일들이라고.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습관론이 나오게 되는데, 행복한 사람은 습관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취향이라는 것은 돈 들이고 시간 들인 만큼 개발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랫동안 즐겨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주어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취향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한평생에 걸쳐서 노력을 하고, 또 그만큼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거든요.
사람들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수가 사실은 교양이에요. 하지만 사회적인 여러 이유로 취향이라고 말하거나, 위장하거나,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반대로 사람들이 교양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취향이기도 해요.
「코스모스」 - 칼 세이건
오래된 과학 고전이자 대표적인 벽돌책. 기본적으로 코스모스 즉, 우주를 설명하는 책이나 지구와 태양계 행성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발견이 일어났던 지구의 오랜 역사부터 최근의 역사, 그리고 그저 이 방대한 우주에 태양계라는 변방의 작은 행성의 먼지에 불과한 우리가 역설적으로 얼마나 희소한 종이며 그렇기에 개개인의 삶이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그의 인류애적 관점을 듣다보면 이건 사실 과학책이라기보단 일종의 철학책이지 않나 싶다.
이 글을 쓰는 짧은 이 순간에도 저 먼 우주에서의 수많은 별들의 멸망과 탄생 그리고 수십억 지구인들의 개별적인 행동들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으면서도 이 삶을 그래도 충실하게, 지금 이 시간을 그래도 후회 없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런 상상을 하면서 읽었다 보니 칼 세이건의 의식의 흐름과 그의 사랑이 아직도 느껴진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행성은 따분할 정도로 그저 그런 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별은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이에 잊혀진 듯이 버려져 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라는 것도 뭐 그리 대단한 존재도 못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주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겨우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저 그렇고 그런 ‘식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게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칼의 노래」 - 김훈
어릴 적에 재밌게 읽었는데 다시 읽고 싶어 3년 전에 사놓고 책장 구석에 꽂아두었다가 친동생이 읽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책을 주기 전에 다시 읽어야겠다 싶어 열심히 읽었다.
김훈 소설은 뭐 말해 뭐해라는 느낌. 헤밍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 문체의 한국 대표 작가이다. 어릴 때 읽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기반으로 임진왜란 당시 느꼈던 그의 심리를 아주 극적으로 묘사한 명작이다. 예전에 명량의 최민식이 이순신에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는데 「칼의 노래」를 읽다 보면 그만큼 이미지가 찰떡인 캐스팅도 없는 느낌. 문체가 하드보일드해서 더욱더 그 애절함과 처절함이 녹아난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하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동물농장」 - 조지 오웰
사회주의자이지만 소비에트 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조지 오웰의 시대를 초월하는 시대정신이 들어간 불멸의 고전.
내용은 너무 익숙하지만 지금 읽으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조지 오웰도 본인의 에세이에서 밝히듯 당대의 정치 풍자 및 정치적 성격을 담은 우화임에 틀림없으나 나는 앞서 언급했던 권력 중독과 연결해서 직장인들이 가지는 “도대체 우리 회사는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명작이지 않나 싶다. 조직 관리에 고민인 모든 리더들은 다시 이 책을 읽어 보고 본인이 돼지들과 정말 다른지 심각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정말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해 내내 동물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하며 행복했다. 그들은 노동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들 자신과 다음에 올 후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도둑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 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밤 그녀가 새끼 오리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 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 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결혼·여름」 - 알베르 카뮈
여름에는 무조건 이 책을 읽어야지 해서 엘리와 경주 워케이션 가서 열심히 읽은 카뮈의 에세이 모음집.
제목을 보고 떠올렸던 일상적인 결혼이나 여름의 이야기와는 달랐지만 이 책 덕분에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입문하고 시지프 신화, 이방인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의 사르트르까지 연결되는 단초가 되었다.
카뮈를 이해하고 싶은데 「이방인」을 읽은 뒤 「시지프 신화」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픈 책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자가 동요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평정심, 희망을 품지 않는 인간의 그 위대함, 그 영원한 현재, 현명한 신학자들이 지옥이라고 불렀던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 가령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판단이다. 죽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그 순간 사는 것을 택한 것이고, 그렇게 상대적으로 삶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그곳에서 세계는 늘 새로운 빛 속에서 매일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오, 빛이여! 고대 비극에서 자신의 운명과 마주한 모든 등장인물들의 외침이다. 이 마지막 호소는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알았다. 겨울 한가운데서 마침내, 내 안에 거역할 수 없는 여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리아스」 - 호메로스
영화 오디세이아를 개봉 날 보고 나서 3주 뒤 아이맥스 재관람 전에 원전을 모두 읽고 싶어 「오뒷세이아」와 함께 둘 다 구매해서 3주간 완독했다.
「일리아스」는 영화 「트로이」의 원전이기도 한데, 제대로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서사시의 특성상 일반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읽기 방식 등에 적응하느라, 어마어마한 등장인물들과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이름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데 누구누구의 아들, 무엇무엇의 신 등 어떤 특정 인물의 지칭 명사가 여럿이다보니 적응하고 나서 후반부부터는 수월하게 읽었다.
이 책에 쏟은 일련의 노력 덕분에 내 독서력을 꽤 상승시키는 기대하지 못한 효과를 얻었는데 지금도 일리아스의 전쟁 흐름을 일부 기억해서 구조도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이고 책을 다 본 후 「트로이」 영화를 보면서 원전과 다른 부분을 비교해보며 꽤 적극적 독서를 했다.
이들의 함선 일백 척은 아트레우스의 아들 통치자 아가멤논이 지휘했다. 그를 따라온 백성들은 수도 가장 많고 또 가장 용감했다. 그들 한가운데에서 그 자신이 번쩍이는 청동을 입고 호기롭게 나아가니 모든 영웅들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더군다나 머릿결 고운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싸우지도 않고 함선들 사이에서 마음 아프게 하는 분노를 되새기고 있지 않은가!
아킬레우스는 친구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에서 아가멤논과 화해한 다음 어머니 테티스의 부탁을 받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무구들로 무장하고 출전해 수많은 트로이아인들과 함께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온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는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가 원한과 슬픔을 잊고 프리아모스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내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 등장인물 소개 중, 아킬레우스
「오뒷세이아」 - 호메로스
영화 오디세이아의 원전. 사실 「일리아스」에 비해 나오는 등장인물도 적고 텔레마코스 또는 오뒷세우스 등 특정 인물에 집중되어 서사가 진행되다보니 일리아스에 비해 훨씬 쉽게 읽었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원전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저승(하데스)에서 일리아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 (영화에 나오지 않는)나 다른 여러 인물들과 만나며 대화하는 장면은 일리아스를 고생하며 읽은 나에게 꽤 큰 도파민으로 기억된다.
다만, 영화에 이미 먼저 익숙해져있어서 세부적인 설정이 원전과 꽤 차이남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스처럼 재밌게 읽지는 못한 것 같다.
주인을 씻어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녀는 아니나 다를까 단박에 그의 흉터를 알아보았다. 그 흉터는 그가 오래전에 어머니의 아버지인 아우툴뤼코스와 그 아들들을 만나러 파르낫소스에 갔을 때 멧돼지의 흰 엄니에 부상당했던 바로 그 흉터였다.
오뒷세우스는 이런 말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분은 벌써 집에 와 있다. 여기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이십 년 만에 고향땅에 돌아왔다.
“이 개 같은 자들아! 너희는 내가 트로이아인들의 나라에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 줄 알고 내 살림을 탕진하고 강제로 하녀들과 동침하고 아직 내가 살아 있는데도 내 아내에게 구혼했다. 너희는 넓은 하늘에 사시는 신들도 후세에 태어날 인간들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모두의 머리 위에 파멸의 밧줄이 매여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이름은 예전부터 듣고 유명한 책이라 남아있는 나날과 함께 엘리와 같이 읽어보려고 산 책.
사전 정보 없이 읽어서 책이 주는 반전이나 스토리들이 꽤 몰입과 인상 깊게 다가왔다. 책 제목이 진짜 문자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나처럼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꽤 카타르시스가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둥지둥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하고많은 무기 중에서 비늘 하나를 찾아 들었다.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윤의 설명을 빌리면,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이 한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거나 “시끄러운 모든 포유동물은 한 범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뭐, 원한다면 그런 범주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진화적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이런 직관적 질서가 우리 내부에 장착된 장치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 질서가 진실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질서가 유용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 질서가 우리 인간 종이 우리를 둘러싼 혼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탐험하도록 도움으로써 수 세대에 걸쳐 기억해왔다는 뜻이다.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많은 사람들이 인생책으로 뽑는 「그리스인 조르바」.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서도 조르바와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관이 혐오를 넘어 거의 처참한 수준이라 다들 추천할 때 조심스러워진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내가 지금 내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정말 현재 이 시점에 실존하고 있는지, 내가 미래의 희망이나 과거의 후회로 현재를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나아가서 남이 만든 욕망과 기대에 나 자신을 맞추어 살고 있는건 아닌지 등 자유로운 삶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한 번쯤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나이가 또 더 들어서 다시 읽으면 다르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이 든다.
새길을 걷고, 새 계획을 세우는 거요. 난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일도 계획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고 있는가?’ 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나!’ ‘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일하고 있네.’ ‘그럼 일을 잘하게!’
조국으로부터, 신부들로부터, 그리고 돈으로부터 해방되었소이다. 이제 체로 치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않아. 사물을 체로 치는 행위는 이제 손 뗐소.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려 하오. 당신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지금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는 중이오.
나는 돈을 깡그리 날려 버렸다. — 게다가 인부들도, 고가 케이블도, 수레도, 물건을 운반할 목적으로 건설한 조그마한 항구도 잃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실어 나를 물건도 없었다. 그런데도 뜻밖에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자 허리가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 같은 그 영감탱이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죠.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보스 양반, 이 두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맞을까요?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철학 에세이. 결혼, 여름을 독해하면서 필수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시지프 신화」였고 소설 「이방인」, 희곡 「칼리굴라」와 더불어 부조리 3부작 중 하나이다.
짧지만 난이도가 꽤 있는 책이었고 읽으면서 정말 고생했다. 해설도 계속 찾아보고 공부하듯이 읽었는데 그래도 이 텍스트가 전하려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어렴풋이 잡은 것 같아서 4분기에 변광배 교수가 쓴 시지프 신화 해설서를 또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특히 내세에 대한 희망 또한 철학적 자살이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보라 같은 텍스트가 주는 의미들이 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에너지가 있는 텍스트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자유는 정신과 행동의 자유다. 그런데 부조리가 나의 모든 영원한 자유의 기회를 소멸시킨다면 그것은 반대로 나의 행동의 자유를 나에게 돌려주고 강화시킨다. 이 희망과 미래의 박탈은 곧 인간의 정신적 개방성의 증대를 의미한다.
이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이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서 함께 자란 캐시, 토미, 루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이들의 어린 시절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질수록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세계의 진실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제목도 처음과는 다르게 들린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생각한 건 그림이나 글쓰기, 음악 같은 예술 활동의 의미였다. 작품에 영혼이 드러난다는 이야기. AI가 대부분의 저작 활동을 가져가는 상황에서도 내가 직접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잘 만들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영혼이 여기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에밀리 선생의 설명은 학생들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자기 위로이자 합리화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이 헤일셤에서 보낸 어린 시절만큼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았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인데 스스로 존엄성과 삶다운 삶을 내려놓고 하루를 맹목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 경제적이지 않지만 낭만적인 것. 그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다.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걸어 온 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헤일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단순히 듣는 게 아니라, 마치 자기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처럼 헤일셤을 ‘추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삶이 곧 완결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게 해서 그것들이 실제로 자기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고, 약 기운과 통증과 피로감으로 잠 못 이루는 그런 밤 동안 내 기억과 자기 기억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너희 모두에 대한 기억도 남은 것 같구나. 우리가 아니었다면 너희가 훨씬 참혹한 삶을 살았을 거라는 인식 말이야.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독서의 기술」 - 고명환
한때 개그맨이고 연예인이었던 지금은 독서로 유명한 고명환 작가가 자신을 바꾼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읽고, 질문하고, 생각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풀어낸 책. 나도 독서를 영업해야하는 입장에서 베스트셀러들은 어떤 이야기로 사람들을 설득하는지 궁금하며 고명환 작가의 책을 읽었다. 이번 분기에 읽은 여러 독서법 책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많이 읽을 것인가”보다 “읽으면서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정리해볼 만하다.
내가 밑줄을 남긴 부분을 다시 보면 정답을 얻는 독서보다 질문을 얻는 독서, 읽은 문장을 산책하며 생각하고 다시 글로 남기는 과정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정말 내 것이 되었는지는 다른 문제이고, 결국 이렇게 감상을 다시 쓰는 일까지 해야 그 간격이 조금 줄어들 것이다.
독서를 추천하는 글인데 시니컬하게 접근했지만(유명한 사람의 글이 으레 그렇듯) 나도 독서 애호가로서 일부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좋은 책들을 많이 추천받아서 그걸로 만족한다.
인문학은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질문을 던져 준다.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만들어진다. 이런 능력을 가장 잘 키워주는 분야가 문학이다.
나 + 문장 + 산책 = 깨달음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성장한다. 깨달은 생각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써야 한다. 글로 적어야 한다. 생각으로 그치면 날아가고 만다. 글씨로 내 가슴에 새겨야 한다. 글은 반드시 손글씨로 써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일단 노트북에 생각들을 입력하고 다시 손글씨로 옮겨 적는다. 손글씨로 옮겨 적다 보면 반드시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고, 기존의 생각들이 변형된다. 그렇게 또 변화를 따라가며 적어라.
1권이 조금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2권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그 순간 진도가 안 나간다. 1권을 다 읽고 2권이 없어서 다시 1권을 훑어보게 되더라도 읽을 책이 부족한 편이 독서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과 「시지프 신화」를 읽고 결국 이어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카뮈의 소설. 유명한 첫 문장부터 뫼르소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감정 표현과 어긋난다. 짧고 문장도 어렵지 않은데, 그래서 읽기 쉬운 소설이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여전히 아니다.
「시지프 신화」를 읽고 이어서 다시 읽으니 부조리 철학의 한 축으로 다시 감상을 했는데 뫼르소의 극단적인 상황을 우리 삶으로 치환하면, 우리 모두가 사형수이다. 즉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슬프지 않는데 슬픔을 강요하고 기쁘지 않는데 기쁨을 강요한다. 타인과 사회는 어느 정도 사회인으로서 연기를 강요한다.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도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타인이 기대하는 역할에 나를 가두지도 않으면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소설의 결말을 생각해보면 그 또한 이 사회에서 정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매번 생각과 질문이 달라지는 거 보면 고전은 고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 저자의 서문
「10억짜리 독서법」 - 손승욱(우기부기)
우기부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손승욱의 독서법 책. 제목은 꽤 자극적이지만 내가 읽었던 이유는 지금 만드는 독서 모임에 적용할 시스템을 스터디하기 위해서다. 책에서 얻은 내용을 자료화하고, 다시 꺼내 쓰고, 실제 삶에 적용하는 과정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읽을 때 이해한 것과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결국 이 책에서 나에게 남은 숙제는 독서법을 하나 더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록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앱이 대신 생각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고, 내가 다시 생각할 재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것.
하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다면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얻은 지식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지식을 적용해보면서 그 지식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내는지 명확히 느껴봐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지식의 적용 능력이 상승합니다. 지식이 어떤 맥락 속에서 활용되고 또 어떤 식으로 지식을 응용해 나가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또한 이때야 비로소 깨달음의 희열뿐만 아니라 독서가 삶을 바꾸는 깊은 즐거움까지 맛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책이 저자의 기준으로 집필되었다면 ‘자료화 노트’는 나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머릿속 생각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며 변화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기록하는 순간, 흘러가던 강물을 붙잡게 됩니다. 그 순간의 사유가 고정된 형태로 실체화되는 것입니다.
‘실행 노트’입니다. 이것에는 습관 개선과 같은 자기계발 실행 지침이나 직장에서 해야 할 실행 지침을 모두 넣어둘 수 있습니다. 실행 노트 안에서 각각의 카테고리를 분류해두면 좋습니다. 가령, ‘업무’, ‘습관 개선’, ‘공부’ 등 원하는 목표대로 분류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이 노트를 삶의 현장에 항상 가지고 다니며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1984」 - 조지 오웰
「동물농장」에 이어 읽은 조지 오웰의 소설. 감시, 기록의 조작, 언어의 통제까지 권력이 개인의 생각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윈스턴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개인적인 공간마저 사라지는 과정이 무섭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알아서 정보를 내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와 주제만 받아보며 스스로 편향되어 간다. AI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다가 생각하는 과정까지 외주해버리는 일도 벌어진다. 내 감상에 돌아오는 AI의 답변조차 그 틀 밖에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텔레스크린”이 어쩌면 우리 손에 쥐어진 세상인 것이다. 「지능파산」, 「사고외주」를 읽고 「1984」를 읽으니 그 연결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101호실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 빅 브라더에게 굴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윈스턴의 일기는 이 세계에서 반역 행위이자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자 활동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계속 책을 읽고 일기든 독서 후기든 직접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생각을 내 문장으로 남기는 일은 계속하고 싶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의 위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개심을 드러낸 군인의 얼굴 대신 검은 머리에 검은 수염을 기른, 권력과 신비스러운 정적에 싸인 빅 브라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다. 만약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이에 따르게 마련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톨스토이의 짧은 소설. 예전에 읽었을 때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읽으니 죽어가는 과정에서 오는 묵직함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오히려 어릴 때보다 지금 죽는다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중환자를 돌보는 시간은 돌아가신 조부모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었던 시간이기도 하고, 앞으로 부모님과 나 자신을 통해 다시 맞이할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반 일리치보다 그 순간을 더 잘 맞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은 두렵다. 그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죽는다. 인간이기에.
결국 남은 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일일 것이다. 언젠가 죽음이 왔을 때,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도록. 머리로는 늘 알고 있던 그 말을 짧은 소설 한 편이 다시 몸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책은 나이가 들수록 다시 읽어볼 수밖에 없겠다.
‘어쩌겠어, 죽었는걸. 하지만 나는 아니잖아.’ 그들은 저마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꼬박 사흘에 걸친 끔찍한 고통과 죽음. 그건 지금, 어느 순간이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생각에 그는 일순간 섬뜩해졌다.
‘정말 그렇다면.’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쳤다는 의식을 지닌 채 삶을 떠난다면, 그걸 바로잡을 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뭐지?’ 그는 똑바로 드러누워서 자기 인생을 통째로, 완전히 새로이 되짚어 보았다.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 이충녕
여러 철학적 개념과 질문을 빠르게 훑어보는 입문서. 설명은 가볍게 따라갈 수 있지만 각각이 던지는 질문까지 가볍지는 않다. 철학을 처음 읽어보려는 사람에게 추천하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의 책장에서 꺼내서 빠르게 읽은 책인데 충코라는 철학 유튜버의 책인지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시간 될 때 그의 영상이나 다른 책들도 한번 보려고 한다. 대부분 철학 입문 서적이 해외 서적이다 보니 아주 쉽게 쓴 책이고 이 책에서 나오는 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이 익숙해져서 지금 읽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등의 철학을 처음으로 만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기대했던 카뮈 부분이 좋았다. 희망을 모두 내려놓은 사형수가 오히려 자유롭다는 설명을 읽으며 앞서 고생하면서 읽었던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의 이해도가 확실히 올라갔다. 철학책을 반드시 쉬운 책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려운 원전을 먼저 읽고 이런 설명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꽤 효과가 있다.
마지막에 만난 자비의 원리도 남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말을 가능한 한 호의적으로, 말이 되게 해석해보는 것. 철학이 이유와 의미를 끝없이 묻는 일이라면 그 질문은 결국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갈 것인가로 이어진다.
그런데 카뮈가 말하는 사형수는 이렇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초월적인 가치는 결국 희망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카뮈의 사형수는 정말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이다. 그는 신에게 의지하지도, 다음 생을 기대하지도, 영원한 진리를 찾아 헤매지도 않는다. 그는 어떠한 희망도 더는 찾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희망을 버림으로써 그는 오히려 가장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불안도 집착도 없다. 그는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도 벗어난다.
자비의 원리는 상대의 말이 명백하게 틀린 것처럼 들리더라도 일단은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해보아야 한다는 원리이다. 단순히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말이 되게 해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해고되었다고 생각한 전직 골키퍼 요제프 블로흐가 한 여성을 살해한 뒤 떠돌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소설. 제목만 보면 어떤 불안에 관한 심리 묘사를 기대하게 되는데, 정작 내가 읽으며 가장 힘들었던 건 주인공의 감정보다 행동과 주변의 묘사가 앞서는 방식이었다.
문체는 건조하고 장면은 빠르게 지나간다. 하드보일드 문체랑은 다른게 그냥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서 그가 바라보는 시선만을 따라간다. 그래서 보통의 소설처럼 인물의 생각을 따라가며 이해하려고 하니 자꾸 길을 잃었다. 블로흐가 표지나 말, 몸짓에 의미를 붙이고 의심하는 모습에서 언어가 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지,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 있는 그대로인지 같은 질문은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다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페널티킥 장면처럼 우리는 공에 집중하느라 그 뒤의 골키퍼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끌었다.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되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가 바라보는 주위 풍경들은 글자의 형상으로 그의 눈에 확 들어와 박혔다. ‘호출 부호 같군.’ 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지시문 같군!
그는 판매업자에게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공격수나 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공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공사장에서 눈짓 한 번으로 일꾼을 해고한다? 독자가 볼 때 이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서류로 통지된 것도, 말로 전달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감독이 힐끗 쳐다본 것을 주인공이 해고 표시로 지레짐작하고 공사장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 작품 해설
「돈의 속성」 - 김승호
돈을 버는 방법뿐 아니라 돈을 대하는 태도와 관리하는 기준을 다루는 책. 읽는 내내 든 생각은 “처음 사회 생활할때 읽었으면 좋았겠다”. 수입이 많아지면 돈 문제도 알아서 해결될 것처럼 살았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된다.
책에서 주로 말하는 건 거창한 투자 전략보다 현금흐름을 파악하고, 매달 신용카드 비용과 소비를 줄이고, 돈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운용할지 미리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내 돈을 귀하게 대하는 만큼 남의 돈도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도 좋았다. 돈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은 지나갔지만 지금부터라도 계획은 세울 수 있다.
정기적이고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보통 그 액수의 100배 규모 자산의 힘과 같다. 그만큼 정기적인 자산은 높은 가치를 가진 고품질의 자산이다.
절대로 미래 소득을 가져다 현재에 쓰면 안 된다. 신용카드를 잘라 버리고 직불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신용카드사에서 주는 포인트는 잊어버려라.
공금, 세금, 회비, 친구 돈, 부모 돈은 모두 남의 돈이다.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내가 돈을 대하는 진짜 태도다. 친구가 돈을 낼 때 더 비싼 것을 시키고 회식 때 술을 더 주문하는 행동은 내가 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다. 세금이나 공금 같은 공공 자산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돈 역시 함부로 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나는 신용카드가 없거나 잔액을 매월 모두 정산한다. 18) 나는 내 명의의 집을 가지고 있다. 19) 자동차를 사면 5년 이상 타며 지난 3년간 무사고다. 20) 나는 현재 잘 사용하지 않으면서 계약 때문에 지불하고 있는 월 정기지출이 없다.
— 부자가 될 준비를 마쳤는지 알 수 있는 30개 질문 중
「인간의 굴레에서 1·2」 - 서머싯 몸
「면도날」에 이어 읽은 서머싯 몸의 장편 소설.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에게 맡겨진 소년 필립이 학교를 다니고, 사랑을 하고, 자신의 재능과 한계를 만나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두 권을 읽는 동안 정말 필립의 삶을 같이 사는 기분이었다. 역시 서머싯 몸은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어린 필립의 열등감과 수줍음, 그림을 배우러 갔다가 재능의 벽을 만나는 과정에서 내 10대와 20대가 떠올랐다. 좌절감도 거만함도 너무 익숙했다. 밀드레드와의 관계에서는 읽다가 “필립 이 xx 진짜 정신 못 차리네”라는 코멘트까지 남겼다. 이제 좀 나아가겠지 싶으면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답답해서 마음이 아픈데 그렇다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정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런 필립이 결국 하나씩 굴레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머리로만 알던 것이 조금 가슴으로 내려왔다. 종교, 사랑의 정념, 남들이 주입한 이상뿐 아니라 내가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의미마저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가 평범한 삶을 선택하는 결말은 그래서 오히려 해피엔딩으로 느껴졌다.
우리 삶은 무늬가 있는 양탄자다. 내가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은 그 양탄자의 무늬 하나일 것이다. 각각의 순간에는 도대체 왜 이러고 사나 싶어도 돌아보면 꽤 그럴듯한 무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 무늬 하나를 만들기 위해 충실히 하루를 살아보자. 이번 분기에 읽고 남은 감정이 가장 긴 소설 중 하나다.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자의식은 아주 강해졌다. 갓난아이는 자기 몸이 자신의 일부임을 알지 못한다. 주변의 사물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 발가락을 가지고 놀면서도 그것이 옆에 있는 딸랑이가 아니고 제 몸의 일부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점차 고통을 통해서 제 육체의 실재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도 같은 체험이 필요하다.
필립은 그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던 결정, 그리고 밧줄로 땅바닥에 꽁꽁 묶인 듯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었던 무력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책에서 지혜로운 말은 많이 읽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체험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 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엘리의 책장에서 우연히 꺼내 읽은 에릭 와이너의 철학 여행기.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법, 걷는 법, 즐기는 법, 관심을 기울이는 법 같은 삶의 태도를 배운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책을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꽤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점점 생활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고통의 부재로 읽고 나니 속초 여행에서 느꼈던 자연의 정취와 고요함도 다르게 보였다. (이 책을 속초 워케이션 기간동안 읽었다.) 꼭 최고로 비싼 음식을 먹거나 강렬한 자극을 받아야 행복한 건 아니다. 지금의 평정심도 충분히 쾌락일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예술과 음악을, 시몬 베유를 통해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다시 생각했고, 카뮈의 “행복한” 시시포스도 조금 더 선명해졌다. 저자의 자기 비하 섞인 유머와 시니컬한 딸과의 엉뚱하면서도 깊은 대화도 좋다. 보통 이런 책은 한두 챕터쯤 힘이 빠지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빠지는 챕터가 없었다.
쉬운 철학책도 많고 깊은 철학책도 많다. 하지만 쉽고 재밌게 읽으면서 나름의 깊이까지 맛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을 무조건 추천하겠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 positive 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턱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가늘어지며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베유는 이런 식으로 근육을 쓰는 게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개인적이지 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빌려온 진실은 빌려온 속옷만큼이나 잘 맞지 않으며 그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삶을 표준화된 시험처럼 살지 말고, 간디처럼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여겨라. 이렇게 몸소 체험한 개인적 철학의 목표는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 진실이다. 어떠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나는 사랑이 인간의 중요한 감정이며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내가 딸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목소리 하나가 점점 커진다. 목소리는 내게 말하고 있지 않다. 소리치고 있다! 니체다. 니체는 내가 똑같은 이 길을 걷고 또 걷게 될 거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어설프게 만지작거리다 매번 액정부터 바닥에 떨어뜨릴 것이다. 영원히. 나는 또 피를 흘릴 것이고 또 조바심칠 것이다. 영원토록. 그래도 괜찮은가? 니체가 묻는다. 이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가?
“춤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 것. 아니, 외칠 것. 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너무 유명한 책이라 오히려 무언가 대단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시작하기 어려웠다. 막상 펼쳐보니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과 데미안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술술 읽혔다. 헤르만 헤세는 역시 이야기를 잘 풀어낸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는 어린 싱클레어를 보며 어릴 때 어떤 큰일에 얽매여 쩔쩔매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뒤에도 상사의 권력이나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두려움에 붙잡혀 있던 일이 있었다. 데미안의 도움으로 벗어난 뒤에도 스스로 서지 못하고 또 의존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성장 소설이라고만 생각하면 뒤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종교적인 상징과 당시의 시대 배경을 모르니 문장들이 선명하게 이해되기보다 인상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해설 영상을 찾아보며 다시 생각했는데,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라는 말만으로 묶어둘 작품은 아닌 게 확실하다.
나는 이미 알을 깨고 나왔나? 아니면 또 다른 알 속에 갇혀 있나? AI로 또 다른 세계가 다가오는 지금, 내가 종래에 정의했거나 타인이 정의해놓은 세계를 계속 깨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분기에 읽은 책들 중 지금의 시대와 가장 자주 연결하며 읽은 소설이다.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준 데서 비롯해. 예를 들면 뭔가 나쁜 일을 했고 상대방이 그걸 알아. 그럴 때 그가 너를 지배할 힘을 가지는 거야. 알아들었니? 이제 분명하지, 안 그래?
“말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크나우어. 사람들은 그런 일에서는 서로 도울 수 없어. 나를 도와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어. 너 스스로 생각해 내려고 애써야 해, 그러고는 정말로 네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 그걸 하면 돼.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아. 네가 너 자신을 찾아낼 수 없으면 다른 영(靈)들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대한 청새치를 낚고 상어 떼와 싸우다 돌아오는 노인 산티아고의 이야기. 지난한 사투를 읽다 보면 육체는 파멸할 수 있어도 정신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장이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느껴진다. 그가 또다시 바다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든다.
하지만 이번에 나에게 더 와닿은 건 불굴의 정신이나 그릿보다 연대였다. 혼자 너무 멀리 나갔던 노인에게는 소년 마놀린이 있었고, 그를 걱정하고 찾던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하며 싸웠지만 그는 정말 혼자가 아니었다.
소년과 함께 다시 바다로 나간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대어를 잡고 상어까지 물리쳐 항구에서 잔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건 내가 결말 뒤를 상상해본 이야기다. 나이가 들수록 고독을 자처하면서 우리는 더 약해지는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번에는 그 따뜻함이 가장 오래 남았다.
이제 노인의 머리는 맑을 대로 맑아졌고 단호한 결의로 흘러넘쳤지만 희망은 별로 없었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거든,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상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큰 고기를 힐끗 바라보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상어가 공격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혹시 해치울 수 있을지는 몰라.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그놈들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만거야.” 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 “그렇지. 정말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 박찬국
니체의 생각을 일상적인 삶의 고민에 연결해서 읽기 좋은 책. 가볍게 시작할 수 있지만 니체의 원문 인용이 많고 그 문장들을 풀어가는 설명에도 깊이가 있어서 좋았다. 올해 안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온전히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가장 남은 건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나약할 수 있고, 자기 생각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자가 더 강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지난날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가. 그런데 그렇다고 회의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위험하다. 내 생각을 계속 의심하면서도 그 의심을 핑계 삼아 멈추지는 않는 것. 늘 내 앞에 놓이는 과제인 것 같다.
욕망을 무조건 탓하거나 잘라내는 대신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키라는 말도 좋았다. 내세의 희망에 삶을 맡기기보다 지금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행동하는 것. 카뮈를 읽으며 느꼈던 생각과도 맞닿아 있었다. 때로 나약해지더라도 다시 의심하고 다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자.
이 삶을 온전히 똑같이 다시 살아야 한다고 할 때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영원회귀 문장을 옮기면서 남겼던 질문이다.
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너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 번, 나아가 수 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야만 한다. 모든 것이 동일한 순서로 말이다. 이 거미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지금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역시 회전할 것이다.”
—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이전에 옮겨 둔 인용
정신의 강함, 정신의 힘과 정신의 넘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서 입증된다.
— 책에 인용된 니체의 문장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은 확신마저도 허용한다.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위대한 정열은 확신을 이용하며 확신을 다 사용해버리고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 그것은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한다.
— 책에 인용된 니체의 문장
니체는 종교적 성인들처럼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박찬국의 해설
니체는 우리에게 나무처럼 살 것을 요구합니다.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위를 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천상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희구하지 말고 이 지상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지상의 삶을 긍정하면서 초인의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박찬국의 해설
「독서모임 꾸리는 법」 - 원하나
온라인 독서모임을 준비하면서 읽은 실용적인 안내서. 모임을 만들고 책을 고르고 발제를 준비하고 실제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까지, 오프라인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막연히 책을 같이 읽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오겠지 싶지만 준비 없이 모이면 대화가 금방 바닥날 수 있다는 설명이 좋았다. 발제는 거창한 문서보다 대화가 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뼈대라는 것. 구체적인 예시와 마지막에 추천한 참고 도서들도 도움이 되어서 하나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내가 준비하는 독서모임은 온라인이라 그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것과 바꿔야 하는 것이 있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게 할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나니 무엇을 보완해야 할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는 최소한의 발제 준비는 하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경험상 준비 없이 진행되는 모임에서는 이야기가 금세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감상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충실히 하기 힘듭니다. 발제는 독서모임의 뼈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리하면, 발제 준비는 가급적 하는 편이 좋지만 발제문은 될 수 있는 한 간소화하고 필요하지 않다면 과감히 제외해도 됩니다. 독서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닙니다. 발제문 없이도 탄탄한 내용이 오간 모임은 머릿속에 오래 남지만, 잘 갖춘 발제문을 놓고도 오간 대화가 부실하면 회원들은 그 모임에서 만족할 만한 감상과 지식을 얻지 못합니다.
비문학 책 읽기 모임과 달리 소설 읽기 모임은 작품 속 인물을 분석하고 각 인물이 처한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소설 속 상황을 다르게 가정해 보며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라면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이야기 나누는 재미가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추측할 때는 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지요. 같은 결말을 읽고도 저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소설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중립의 위치에서 모임을 진행하려면 진땀을 빼기도 합니다.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 모티머 J. 애들러·찰스 밴 도렌
책을 읽는 수준을 나누고 각각에 맞는 읽기 방법을 설명하는 독서법의 고전. 읽었다는 것과 이해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 내가 그 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기준을 알려준다. 온라인 독서모임을 기획하면서 참고하기에도 좋은 책이었다.
나는 책을 그냥 즐거워서 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 그런데 문학을 읽으며 왜 즐거웠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줄거리도 정리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남았다. 실용서는 실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소설은 그 즐거움이 어디서 왔는지. 다 읽었다는 체크 표시 하나로 끝낼 수 없는 문제다.
여러 책을 함께 놓고 주제를 읽는 통합적 읽기도 흥미로웠다. AI를 도구로 활용하면 자료를 비교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질문을 세우고 어떤 책의 어떤 부분을 연결할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뒤에 실린 연습문제까지 제대로 해보려면 시간을 더 두고 돌아와야겠다.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기에는 숙제가 많이 남는 책이다.
작품의 전체 통일성을 파악해야 한다 전체 흐름을 한두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 못 하느냐로 이를 파악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소설을 읽고 마음에 드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보다 더 역설적인 점이 있다. 상상력의 산물인 문학작품은 배움보다는 즐거움을 준다. 배우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 왜 즐거운지 알아내기는 정말 어렵다는 역설이다.
더 나아가 원칙을 실제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실용서를 ‘실용적으로’ 읽지 못한 것이다.
주제를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질문과 쟁점을 정리하여 내용을 분석한다. 일반적 쟁점을 먼저 다루고 부수적 쟁점을 다루며 그들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고전이 답했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 고명환
「독서의 기술」을 읽고 고명환이 고전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지 더 궁금해져서 읽었다. 짧고 문장은 명료하다. 다만 제목을 보며 기대했던 다양한 고전의 소개와 해석보다는 저자가 감명 깊게 읽은 책들과 자신의 이야기가 중심이라 조금 아쉬웠다.
읽는 중에는 “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지금만 버티면 나중에 보상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여행과 휴식에서 보상을 찾았지만, 정작 매일의 삶에서는 만족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충실하게 살면서 충분한 행복을 느끼는지는 매일 되새겨볼 만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반복되는 이야기와 문체가 조금 질렸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읽은 「독서의 기술」이 더 좋았다. 그래도 책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서 명료하게 전달하는 모습에서는 힌트를 얻었다. 나도 남들에게 책을 소개할 때 무엇을 덜어내고 어떤 이야기를 남길지 생각하게 되었으니, 내 기대와는 달랐어도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자,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얼마를 벌려고 목표 삼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그 많은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지금 행복한가? 지금 얼마를 벌고 있는가? 그 돈을 벌면서 행복한가?
본체의 삶을 살게 된 나는 자유롭다. 잠도 여섯 시간 이상 푹 잔다. 언제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다. 삶의 방향을 찾은 지금은 그림자로 살 때보다 열심히(그림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살지 않지만, 더 안정적이고 자유롭다.
사람의 인생은 고통과 행복이 꼬여서 만들어진 새끼줄 같은 것이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서로 악착같이 꼬여서 튼튼한 줄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 줄을 잡고 원하는 곳으로 올라간다. 행복만 가지고 살겠다는 사람은 한 줄의 실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다. 그런 줄은 튼튼하지 못하다. 여차하면 끊어져 추락하고 만다.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괴물을 만들어낸 과학자와 그가 버린 피조물의 이야기로만 알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슬픈 소설인 줄은 몰랐다. 괴물의 악행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프랑켄슈타인의 무책임한 대처 역시 이 모든 비극을 만든다. 누가 괴물인가 (또는 누가 인간인가)하는 질문이 읽을수록 단순하지 않다.
괴물은 어쩌면 한없이 사랑받고 관심받고 동정받기를 바라는 우리의 에고일 수도 있겠다. 그 바람이 번번이 꺾였을 때 마음은 어디까지 어두워질 수 있는가.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이나 가족, 재능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조건 속에서 타인의 인정과 사랑만을 나의 존재 이유로 삼으면 그것이 무너질 때 나도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괴물이 자신의 어두운 면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타인에게서만 반대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온다는 이야기와도 연결해서 생각했다. 다만 혼자 일어서라는 말만으로 끝내기도 어렵다.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화를 내는 사람에게 조금 더 연민을 가지고 손을 내밀었다면, 그가 스스로 일어설 작은 불씨를 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인간은 얼마나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며 그렇지 못했을 때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괴물의 목소리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유명한 이야기라고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오, 프랑켄슈타인, 다른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면서 나 하나만 짓밟지는 말아주시오. 나야말로 누구보다 그대의 공정함, 심지어 관대함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란 말입니다. 기억해주시오. 나는 당신이 만든 존재라는 것을.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소. 그대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내게서 기쁨을 박탈했어요. 더없는 행복이 보이는 온갖 곳에서 나 혼자만 돌이킬 수 없이 배척을 당하고 있소. 원래 나는 어질고 선했소. 불행 때문에 악마가 된 겁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오, 그러면 다시 선한 자가 되겠소.
놈은 유창한 달변으로 마음을 얻습니다. 나 또한 놈의 말에 맥을 못 추었으니까요. 그러나 놈을 믿으면 안 됩니다. 놈의 영혼은 배신과 악의로 가득 차 생김새 못지않게 끔찍합니다. 괴물의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나는 비탄에 빠져 스위스로 돌아갔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가엾게 여겨졌습니다. 두려울 만큼의 연민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의 존재와 거기 수반되는 말 못 할 고통을 일으킨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 비참과 절망만 잔뜩 안긴 주제에 나는 영원히 금지당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복수심의 허기를 힘입어 나를 가득 채웠습니다. 내가 했던 협박을 기억해냈고 그 일을 집행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치명적인 고통을 자초하는 짓임을 알면서도 나는 충동적 본능의 주인이 아닌 노예 상태였기 때문에 그 본능을 혐오하면서도 순순히 따랐습니다.
「인간의 대지」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비행 경험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산문. 사하라사막과 안데스산맥을 날고, 불시착과 생존의 위협을 겪고,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기억하는 글을 읽다 보면 비행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이 보인다.
소설처럼 읽히다가도 산문시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된다.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문단도 꽤 있었지만 그저 그가 비행하며 느꼈을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려 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사막과 산맥을 날며 이 드넓은 인간의 대지를 바라본 기분이다.
내가 읽으며 느낀 건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료애였다. 역경 속에서도 그는 세상과 인간과 대지를 계속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과 바다」에서 그랬듯 여기서도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오래 남는다. 다음에 비행기를 타면 이 책의 문구들을 다시 읽으며 창밖 아래를 바라보고 싶다.
마침내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오래도록 자신만의 침묵에 갇힌 채 혹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나누면서 평행하게 걸어왔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서로 돕는다. 그리고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를 넓혀 간다. 우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이때 우리는 마치 바다의 광대함에 경탄하는 해방된 죄수와도 같다.
“눈 속에서는 생존 본능이라는 게 사라진다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걷고 나면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지거든. 나도 그랬어.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 아내는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 걸을 거라고. 동료들도 내가 걸을 거라고 믿을 거야. 그들은 모두 나를 믿고 있어. 그러니 걷지 않는다면 내가 나쁜 놈인 거야.’ 이렇게 말이야.” 그래서 자네는 계속해서 걸었네. 얼어서 부풀어 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나이프 끝으로 구두 속을 잘라 냈지.
한 직업의 위대함이란 어쩌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이어주는 데 있을지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부(富)란 하나뿐이고,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부이니까. 우리는 오직 물질적인 부를 위해 일함으로써 스스로 감옥을 짓는다. 우리는 타버린 재나 다름없는 돈으로 우리 자신을 고독하게 가둔다. 삶의 가치가 깃든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살 수 없는 그 돈으로.
하지만 그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에는 닫힌 창문과 꺼진 별빛과 잠든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서로 맺어지기 위해 꼭 노력해야 한다. 들판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저 불빛들 중 몇몇과 소통하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철새 떼가 이동하는 철이 되어 야생 오리들이 날아갈 때면, 오리들이 굽어보는 지역 위로 이상한 물결이 인다. 집오리들이 커다랗게 삼각형을 만들어 비행하는 무리에 이끌린 듯 서투른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성의 부름이 집오리들의 마음속에서 알지 못할 야성의 흔적을 일깨우는 모양이다. 일순간 농가의 오리들은 철새로 변한다. 늪과 벌레와 오리집같이 보잘것없는 영상만이 빙글빙글 돌던 그 작고 딱딱한 머릿속에서 이제는 광활한 대륙과 바닷바람의 맛, 해양의 지리학이 펼쳐지는 것이다.
오리는 제 머리가 그토록 경이로운 것들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크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날개를 퍼덕이고 낟알과 벌레를 깔보며 야생 오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처음에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보다 훨씬 매운맛인 치정극이라고 생각했다. 파티와 복잡한 남녀 관계,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잘 읽혔지만 첫인상은 도대체 이게 왜 그렇게 좋은 고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닉의 시선을 따라가며 개츠비를 조금씩 연민하게 되었다.
개츠비는 실제의 데이지보다 데이지라는 과거의 기억과 자신이 만든 이상을 사랑한다. 데이지는 돈이 주는 세계를 쫓는다. 환상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삶의 의미와 동력을 주지만, 그 생생했던 비전이 꺾이면 삶은 잿빛이 되어버린다. 닉이 범법자이기도 한 개츠비를 경멸하면서도 끝내 동정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개츠비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떤 낭만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낭만을 철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경하는 또 다른 내 모습은 닉에 가깝다. 낭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려는 모습은 열정으로 가득해 보이면서도 때로는 혐오스럽다. 개츠비는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그 정도의 대가 없이 소소한 낭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처음의 감상이 마지막에 꽤 많이 바뀐 소설이다.
심지어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가 품어 온 환상의 거대한 힘 때문에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그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인간들은 썩어 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말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행동에 찬성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해 준 유일한 찬사였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서평 쓰는 법」 - 이원석
좋은 서평을 써보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독후감과 서평의 차이를 짚어준다.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쓰던 건 독후감이었구나”였다. 내 느낌을 적는 일에서 조금 더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그 책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전달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알려준다.
다만 구체적인 글쓰기 방법이나 좋은 서평의 사례 분석을 기대한다면 조금 아쉽다. 서평의 개념과 역할, 기본적인 태도를 주로 설명하고 예시들도 부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좋은 서평을 많이 읽어야 좋은 서평을 쓸 수 있을 텐데 그 부분은 결국 내가 직접 찾아봐야 할 숙제로 남았다.
그래도 글을 쓰기 전에 책을 어떻게 읽고 질문할지, 독서모임에서 어떤 가이드를 제공할지에는 참고가 되었다. 마지막에 서평 쓰기가 민주 사회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과장된 느낌도 있었지만, 더 읽고 더 쓰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는 해주었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직접 많이 써보는 일이다. 책을 읽는다고 글이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을 테니.
서평은 이와 다릅니다. 서평은 그 서평을 읽어 줄 다른 이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책의 독자인 서평자의 정신이 서평의 독자이자 그 책의 예비 독자에게 나아가는 겁니다. 서평의 일차 목적은 서평을 읽는 독자를 자기의 주장으로 끌어들이고, 독자에게 서평자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서평과 독자 사이에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이 개입합니다. 서평은 해당 책에 대한 서평가의 해석과 평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나아가 설득하려 합니다.
서평의 핵심 요소는 요약과 평가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요약 없는 서평은 맹목적이고, 평가 없는 서평은 공허합니다. 맥락화에 기초한 평가가 없다면 서평은 의미가 없지만 그 평가의 근간에는 충실한 요약이 자리해야 합니다. 책에 대한 요약으로 통제되지 않는 평가는 목적지 없이 날아다니게 됩니다. 독자는 평가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보지만, 그 건축물이 서 있는 토대는 요약입니다. 토대가 부실하면, 건축물은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특히 마음에 와 닿거나 불편하게 다가온 본문을 옮겨 적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보세요. 이렇게 발췌하고 평가하는 글이 축적되면, 그게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서평 쓰기는 단순한 개인적 도락을 넘어서서 강력한 정치적 행위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좋은 책을 읽고, 멋진 서평을 쓰는 것은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는 교양 혁명의 첫걸음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성원으로서, 국가를 이루는 시민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선택입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서평이 차곡차곡 쌓이는 만큼 우리가 사는 사회도 건강해질 겁니다. 우리가 쓰는 오늘의 서평에 우리가 사는 사회의 내일이 달려 있습니다.
나가며
책을 잘 읽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더라. 그리고 AI 시대에 내 생각을 잃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술은 독서의 기술이다. 알고리즘이 최적화된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 말고 일단 저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먼저 듣고(읽는다는 건 먼저 듣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고 여러 질문들을 나누는 경험. 최근 내 유튜브 영상 추천 알고리즘도 내가 읽은 각 문학 작품의 해설 영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일리아스」를, 엘리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작품도 깊게 읽다 보면 내가 가보지 않은 세계와 타인의 생애를 내 일처럼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때로는 내 판단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생각도 풍부해진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독서 모임은 조금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나누고 싶다는 내 열망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에 온라인 독서모임 ritread.com을 준비/모집 중이다. 혼자서는 습관이 안 들고 오프라인 독서 모임은 부담스럽다면 구경해보면 좋을 듯싶다. 10월 중순쯤 시작할 예정이고 내가 읽은 검증된 책들만을 가지고 매일 책을 읽고 그리고 매주 읽은 만큼 글을 쓰게끔 준비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신청해보시길.
(좀 더 덧붙이자면, 해당 모임을 위해 만든 앱 rit. 덕분에 하루에 몇권을 병렬로 읽어도, 문장을 하이라이팅하거나 생각을 중간중간에 메모하는데 수월하다보니 더욱더 책 읽기가 빨라졌다. 7월에는 기능의 초창기에서 9월까지 기능이 고도화되면서 같이 독서량이 늘어난 것.)
권수 자체에 집착하지는 않았는데 더더더 욕심을 내다보니 꽤나 읽게 되었다. 1년에 100권이라는 숫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이지만 목표점으로서 내가 읽기 싫을 때 읽게 하는 딱 그 정도의 동기부여 장치로서의 목표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짧은 책들을 많이 읽은 덕분에 권수가 늘어난 면도 있다. 그래도 읽어야 하는 책과 읽고 싶은 책,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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