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Go back
🔄 회고

2026년 1, 2월을 보내며 - 회고 아님

2025년은 나에게 안식년이었다. 특히 퇴사하고 4월 한 달간의 이탈리아 여행은 쉼 없이 일했던 나에게(그리고 옆에서 묵묵히 곁을 지켜주던 Ellie에게) 큰 위로가 되는 여행이었다. 비가 개면서 반짝이던 베네치아, 피렌체의 전경과 선셋, 아말피 남부해안의 별빛이 반짝이던 밤. 다년간 날 괴롭히던 사업의 빚도 없고 돌아가서 출근할 회사도 없던 나에게 그 순간들은 충분히 충실했다. 시끄럽고 혼란했던 매연 냄새 가득한 나폴리의 거리나 너무 많은 관광객이 북적이던 로마에 지쳐 귀국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여행에 충실했다.

이탈리아 귀국 이후 2025년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다시 24시간 같이 붙어 있게 된 Ellie와 정말 많이 싸우고 화해하고 얼싸안았다. 기뻐하다 울다 잠들었다. 게으르다 자책하고, 다시 깨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 그런 하루들이 반복되었다.

솔직히 초반에 Ellie와 보냈던 시간들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나는 CTO의 권위와 삶, 출근하는 시스템에 이미 익숙해 있었고 사회에서의 나와 가정에서의 나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다. 그 시간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생기는 혼란, 그리고 그렇게 혐오하던 안티패턴을 가진 리더들의 습관들이 이미 나에게 절여져 있었다. Ellie는 내 직원이 아니었고 파트너였기에 의견을 조율하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나는 어려움을 겪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장 혐오하는 모델을 내가 행동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 회사를 나오며 반복되던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는, 승리하지 못하는 조직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글로 정리해서 내보내기 전까지 계속됐다. 안식만을 가져도 충분했을 시기에 나를 충분히 괴롭게 하였다. 나혼자 어둠에 빠져 허우적대고 그럴 때마다 Ellie에게도 많은 상처가 되는 말을 했는데 항상 그렇게 싸우고 나서도 언제나 나를 포용해주는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밥을 차리고 수건을 개고 분리수거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집안일 비율은 그녀가 압도적으로 많다.)

막상 너무나 빨리 지나버린 그 시간을 돌아보니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이라는 아쉬움이 문득 커지지만 퇴사 직후 망가진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회복하는 데에는 으레 그렇듯 또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원래는 무엇을 했고, 어떤 걸 했으며 어떻게 열심히(?) 살고 있는지에 대한 회고를 작성하려고 했으나 사실 딱히 이렇게 쓰는 나의 회고가 크게 무슨 효용이 있나 싶다. 이전 에세이들처럼 시대를 사유(?)하는 글들도 아닌 지극히 개인의 것인데.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힐링이니 이 글을 통해서도 그 목적이라도 달성하면 되겠지 싶어 그냥 막 쓰기 시작했다.

11월에 개인 사업자를 내고 일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다가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고 지난 1월, 2월은 더 이상 루틴에 집착하지 말고, 게으른 나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저 순간을 즐기며 흘러가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재작년 부상이 있음에도 버티기 위해 격하게 운동을 이어가던 것이 결국 24년 하반기에 쉽게 완치되지 않는 여러 부상으로 이어졌고 1년 가까이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회복도 안 된 상태로 26년을 맞이했지만, 1월부터는 조금씩 다시 페이스를 올려 몸에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있다.

12월부터 해서 1월, 2월은 많은 글을 쓰기도 했다. 독자라곤 Ellie와 가까운 지인 몇 명이지만 그토록 쓰고 싶었던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연재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쓰면 쓸수록 어렵다. 그리고 블로그 포스트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작성했다. 평소에 내 안에 쌓아놓았던 여러 감정, 메시지를 글로 엮어보았다. 어떤 글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던 내 블로그에 방문자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글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로 인하여 날 것 그대로의 초안이 약간은 정제하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나 보다. 항상 말과 행실을 똑바로하는 Ellie의 충고는 덤.) 글을 쓰다 보니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 싶어 오닉스 팔마까지 구매해 본격적으로 읽고 있고, 지금까지 올해 3, 4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12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는 알파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고 언제 어떤 타이밍에 배포를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고도화를 해나가고 있다. 급속도로 발전한 AI 코딩 에이전트 덕분에 오히려 일하는 시간은 더 늘어났다. Ellie가 자비스랑 텔레그램 한다고 자기랑 안 놀아준다는 얘기가 그저 귀여운 투정은 아닌 것이 정말 책 읽는 시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 다만, 이제는 프로젝트가 고도화될수록 결국 사람 손을 타서 한 땀 한 땀 봐줘야 하는 부분이 더 많아지고 있다. (당신의 프로젝트가 무엇이든 정말 AI가 모든걸 하고 있는 상태라면, 거꾸로 의심해봐라. 남들도 다 만들 수 있는걸 만드는 건 아닌지. - 에이전틱 엔지니어링 시대의 생존 스킬 9가지)

작년 여름은 인생 최고로 더웠고 이번 겨울은 인생 최고로 추웠다. 20대 초반부터 항상 사업과 일하느라 바쁘게 쭉 살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한 계절감은 생각보다 극적이었다. (30대 초까지만 해도 여름이든 겨울이든 집에서는 반바지만 입고 생활하던 나였는데 이제 긴바지에 수면 양말까지 챙기는 모습을 Ellie가 놀리는 건 덤이다.)

그냥 흘려보내기엔 내 마음이 생각보다 괜찮고 또 뭔갈 본격적으로 정리하고 회고하기엔 아직 결과물이 없어서 흘러가는 이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아 언젠가 다시 들여다볼 나를 위해 글을 작성한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생각들로부터 오히려 안식의 기간이었던 작년보다 많이 안정되어 올해 다시 집중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딱 하나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으면 난 어떤 값도 치를 수 있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인생을 살기를, 그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담아 이 기이한 회고(?)글을 마친다.


Share this post on:

댓글


Next Post
에이전틱 엔지니어링 시대의 생존 스킬 9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