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더 이상 연대의 희망을 밖에서 찾기를 포기했는가?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퇴사를 선언한 직원은 그레고르처럼 벌레로 변신한 것과 같다. 그는 더 이상 가족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흉측한 벌레에 불과하니, 누이동생과 부모의 약간의 연민을 떠나 결국 버려지고 죽는다.
회사에서 퇴사를 선언한 순간 이 변신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한 본부의 본부장, 팀을 책임지는 리더로서 살아가던 나는 그 역할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 살아가던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반면 팀원들은 나의 선언에, 나의 자유에 당혹감을 가진다. 그들이 기대했던 나의 모습, 즉 리더라는 역할을 수행하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으며,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를 외면하는 것이다. 나는 본부장이니까, 책임져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 말 뒤에 숨으면 선택의 무게를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나는 벌레로 변했지만, 나에게 나는 알을 깨고 나온 새였다.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는 단순히 타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은 아니다.
타인은 나를 바라보고 판단하며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한다. 특히 『출구 없음』의 인물들처럼 더 이상 자신의 행동으로 그 판단을 바꿀 수 없는 상태에서는 나는 타인의 시선 속에 고정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행동하고 선택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갱신할 수 있지만, 타인의 판단 속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굳어버렸을 때 그 시선은 지옥이 될 수 있다.
조직에서 나가기를 결정한 순간, 나 역시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슬프게도 좋았던 시절, 함께 연대하며 무언가 일을 해나갔던 그 시절의 기억보다 내 마지막의 모습으로 그들은 나를 정의하게 된다.
가히 지옥이라 할 만하다.
돌아보면 난 내가 어떤 하나의 역할로 완전히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고, 자유롭기를 염원했다. 그 자유가 나에게 어마어마한 압박감으로 오더라도 말이다.
말 그대로 선고받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다만 회사라는 세계에서는 역할로 환원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가려는 나를 진정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현대인의 삶 대부분이 회사라는, 조직이라는 환경에서 일어난다는 걸 감안하면 이것이 얼마나 비극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진정한 연대를 느끼는 게 가능한가?
내가 『테드 래소』와 『더 베어』 같은 작품에 빠지는 이유도 그것이 나에게 결핍된 연대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진정 어딘가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다.
어릴 땐 난 그들과 다르다는 오만함에, 나이가 들어선 이미 좁아진 나의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 때문에.
그렇다고 이 고독으로 내가 지금 힘든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파트너 아내가 있고 나의 가장 못난 부분에도 관용을 베풀고 연민해주는 그녀가 있기에 딱히 사회적 고독이 내 삶의 진짜 고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인생에는 딱 한 명,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이면 족하다.
내가 오히려 조직에 속하며 느낀 건 해당 위치와 사회생활을 위해 다시 알을 만들어 그 세계에 갇혀야 했다는 것이다. 본부장이라는 역할과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역할로 환원되지 않는 나의 자유와 내가 다른 삶을 선택할 가능성을 스스로 외면해야 했다.
내가 그 돈과 지위를 내려놓은 건 결코 하루아침의 변심은 아니다.
애초에 첫 시작을 내 일을 창업하며, 남들이 정해놓은 굴레는 꼴도 보기 싫고 숨 막혀서 20대의 인생을 지내온 내가 30대가 되어 다시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데 나름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아닐 것이다.
그냥 마지막에 내가 그들에게 느꼈던 서운함과 상처가 이제는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가끔 그때 느꼈던 내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 글로써 어느 정도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면 머릿속이 맑아지니 이건 나에게 일종의 치유요, 인생에 득이 되는 활동이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빛을 잃어간다.
지금 현대사회에서 강요되는 페르소나를 연기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역할이 곧 자기 자신인 것처럼 살아가게 되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의 가능성조차 잊어버린다.
그렇게 타자의 시선에서 정의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더 이상 연대를 느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젊은 시절 병역의 의무로 입대하여 고생하던 군대에서보다 못하다.
24시간 같이 생활하는 내무반에서 매일을 연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직 덜 사회화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못남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는 강제로라도 어울려 지내는 그 순수의 시기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내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스스로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음과 더불어, 어느 정도는 내가 순진하게 바라왔던 사회에서의 연대감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조직에 속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연대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고 치부하고 말이다.
환상만을 순진하게 쫓지 말아야 한다.
사업의 세계에서는 결국 돈의 논리가 많은 것을 초월하고, 그걸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나 같은 사람은 —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가와는 별개로 — 사랑받기보다는 미움받기 쉽다.
그럼에도 난 다시 알을 깨고 나왔다.
그들에게 나는 벌레로 변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나는 다시 알을 깨고 나온 새였다.
역할이 곧 나 자신이라는 자기기만을 버리고 자유를 헤매는 사형수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우월감과 오만함으로, 하지만 그렇기에 나를 흉측한 벌레로 바라보던 그들 모두를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 또한 자기기만을 버리고 자유롭길 바란다.
언젠가 서로가 서로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각자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면 마음속에서나마, 멀리서나마 약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삶에 미리 주어진 의미도 없고, 나를 타인이 벌레처럼 바라볼 수도 있는 지옥 같은 세상.
그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나는 끝까지 자유와 죽음을 선고받은 행복한 사형수로 살아갈 것을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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