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이름, 집단, 사건은 허구이며 실존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Author: flowkater
에피소드 3: 균열 - 1
[토요일, 오후 7:12] 김 대리 - 강남, 어느 술집에서
“여~! 김대리!!”
나는 나를 호쾌하게 부르는 그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어, 왔어?”
대충 걸쳐 입고 나온 나와 달리, 그는 꽤 번듯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꽤 마른 체형의 나와 달리 적당한 풍채에, 표정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학교 동기이자 이전 회사 동기였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 움추려든다.
입사를 위해 코딩 테스트를 준비하던 시절, 도서관에서 처음 본 그 친구가 대뜸 다가와 “야, 코딩 좀 가르쳐줘. 밥 살게.”라고 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나와 함께 다니던 이전 대기업을 일찌감치 퇴사하고 한 작은 스타트업 개발 팀장으로 이직을 한 그는, 지금은 직함도 이사였다. 최 이사.
딱히 변화를 추구하거나 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 내 성격상 지금 이 회사에 오게 된, 이직을 하게 된 용기를 가지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다.
최 이사는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웃어보이더니, 묻지도 않고 맥주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안주를 시켰다. 항상 그래왔어서 나도 가만히 그가 주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최 이사가 주문하는 동안 안을 둘러봤다. 강남역 뒷골목 2층, 좁은 테이블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토요일 저녁치고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고, 우리가 앉은 구석 자리에서 입구가 보였다.
“잘지냈냐?”
최 이사와는 아마 지금 회사 이직하고는 처음 본 것 같다. 이직 직후에 내가 연락했을 때 최 이사는 너무 바빠서 힘들다고 그랬고 그 뒤에는 나에게 시간이 너무 없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마저도 프로젝트가 끝나고 두 주가 지나서였다.
“뭐.. 일 때매 한동안 좀 정신없었지.”
혹여 내 목소리에서 좌절감이나 실망감이 드러날까 자제하면서 대답을 했다. 괜찮은 척을 하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이직하고 첫 회의 때부터 그랬다. 아무도 내 의견을 묻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게 석 달이 되었다.
“와, 너네는 그래도 대기업 계열사인데.. 워라밸 보장해야 되는 거 아니냐? 대박이고만.. 고생했다 친구야”
아직 맥주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최 이사는 물잔으로 건배를 했다. 나는 따라서 물잔을 쥐고 한 모금 마셨는데, 최 이사는 물을 마시지 않고 잔을 쥔 채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나도 요즈음 새벽에 자주 퇴근하는데 죽겄다 진짜. 뭐 여기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AI니 뭐니 요즈음 난리인데, 왤케 우리는 일이 줄지를 않냐..”
최 이사는 물컵을 다시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데 진짜 해보니까 개발이 문제가 아니더라.. 팀원들이 진짜 드릅게 말을 안 들어~ 그리고 대표는 왜케 고집이 세냐 죽겄다 죽겄어”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박 팀장님과 부서장님이 생각났고, 하 과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떠올랐다. 다 비슷한 거구나. 스타트업이든 대기업이든. 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다 비슷하구나. 우리도 팀장님이 위에서 엄청 깨지고 팀원들도 뭐라고 하고 그러더라고. 뭐 물론 나도 팀원이지만.. 어떤 마음인지 알겠어”
최 이사는 갑자기 감격한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역시 우리 김대리! 진짜 니가 우리 과, 회사 포함해서 슈퍼 울트라 개발자 그 자체였는데 말이야. 제프 딘 저리가라였잖아 큭큭.”
최 이사가 물컵을 내려놓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타 팀에서 인프라 시스템 개떡같이 관리해 오던 걸 인수인계 받아서 일주일 만에 마이그레이션 해서 ‘저 다 했습니다.’ 하던 그 김대리 아니냐. 넌 진짜 유니콘 개발자다.”
제프 딘?
“컴파일러가 제프 딘에게 경고하지 않는다. 그가 컴파일러에게 경고한다.” 개발자라면 누구나 아는 밈의 그 제프 딘. 그런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고? 온갖 곳에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 하다가 버그 수정에 밤을 새는 나를?
그 이후로는 아무 말이 안 들렸다. 최 이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팀에 너 같은 개발자 한 명만 있었어도 내가 그 고생을 안 했을 건데.. 요즘 것들 왜케 눈치도 없고 날 힘들게 하는지.. 아 우리 대표는 나보다 10살 많아서 요즘 것들도 아니지 크크 .. 그래도..”
맥주가 도착하자 최 이사가 잔을 건넸는데 내가 받는 게 느렸던 것 같다. 최 이사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잔에 맥주를 따랐다.
“뭔 개소리야. 요새 일 바빠서 그냥 코드 복사 붙여넣고, 커밋도 대충하고 진짜 내가 개발자인지 노가다꾼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차. 그가 아직 말을 하는 중이었다. 내 생각이 어느새 말로 나와버렸다.
그 말을 듣던 최 이사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야야, 다른 회사 다 가봐라. 안 그런 데가 있냐. 기술블로그에 온갖 번지르르한 거 써놔도 실상 들여다보면 다들 개판이야. 내가 아무리 가이드라인 잡고 아키텍처 잡아도 잠깐 바빠서 못 들여다보면 완전 개판 나 있는 게 프로덕션 코드 아니겠냐.”
최 이사는 잠깐 말을 멈추고 어느새 나온 맥주잔을 들었는데, 거품이 잔 위로 넘칠 듯 말 듯했다.
“그래도 큰 프로젝트 하나 끝났다며? 고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 주말 출근. 매일 밤 10시, 늦으면 새벽 3시. 끝났다는 감각이 아직도 없었다. 그냥 더 이상 안 해도 된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B2C에 B2B까지 확장하는 시기라서 ‘끝’이라는 게 존재하지를 않아.”
최 이사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거품이 입술에 묻었는데 닦지 않았다.
“그래도 PO랑 같이 결정해서 밤새고 만든 게 딱 릴리즈되고 고객들 피드백 들어오는데, 와 진짜 도파민이 질리지도 않더라고. 내가 대시보드를 하나 만들어 놨거든? 지표 딱 찍히고 매출 딱딱 찍히니까 기가 막히더라. 마케팅 팀이랑 또 같이 연계해서 이번에 무슨 프로젝트를 했냐면..”
나는 맥주잔 위의 거품을 보고 있었다.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고객 피드백. 지표. 매출. 도파민.
지난 석 달 동안 매달린 건 누가 쓰는지도 모르는 프로그램이었다. 고객 접점은 대행업체가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항상 부서장님이 결정하고 박 팀장님이 전달했다. 릴리즈 다음 날이었다. 팀장님한테 “고객 반응이 어때요?”라고 물었더니, 팀장님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잠깐 뜸을 들이다가 “대행업체가… 좋다고 했대.”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봤다. 석 달이 한 줄이 되었다.
최 이사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맥주잔을 들어 마셨다. 입안이 씁쓸했는데 맥주 맛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한참을 떠들던 최 이사는 고객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술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코딩 테스트도 못하던 자기가 눈칫밥으로 돈 벌어 먹고 사는 게 다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과한 겸손이다. 나에게 과외를 받던 당시와 달리 그는 입사 및 사내 엔지니어 레벨 테스트에서 항상 나와 같이 코딩 테스트 상위를 기록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코딩이 아니라 고객 이야기를 한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어느새 술집이 붐비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고, 주문 소리가 오갔다. 테이블 위 안주 접시에서는 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안주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려 테이블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최 이사도 다를 게 없었다. 스타트업에 들어간 뒤로 개인 시간이 사라졌고, 대학 때부터 만나던 여자친구랑도 결국 헤어졌다. 나도 아는 사이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건장하던 체격에 어느새 살이 붙어 있었고, 간이 안 좋아서 한동안 병원을 다녔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나와 달리 그는 활력이 넘쳤다.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났고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같은 야근이었다. 같은 밤샘이었다. 같은 체력 소모였다. 그런데 왜 나만 비는 건지. 그 차이가 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알겠다는 게 더 나빴다.
”.. 그렇지 않냐 친구야?”
“어?”
화들짝 놀라서 최 이사를 바라보았다.
“이 맛에 개발자로 산다고. 이렇게 개고생해도.. 내 힘으로 만들어낸 무언가가 나랑 평생을 만나지도 못할 그런 문화의 저 먼 나라의 누군가가 우리의 제품을 써주고 감동을 받아서 이메일을 보내고 하는 거. 이게 매직이다 이거야. 소프트웨어의 매직!”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주변 테이블이 거의 다 차 있었다. 웃음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가 부르는 건배사. 시끄러워지고 있었는데 최 이사의 목소리만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기숙사 옆 방 친구랑 얘기하려고 몇 달을 밤을 새서 플랫폼을 만드는 찐따들이지만, 그런 찐따들이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그 맛이 제대로지. 내가 너처럼 개발에 특출난 사람이었으면 개발 자체에서 더 많은 도파민을 느낄 것 같은데 내 실력이 미천해서 나는 그런 것보다는 고객 피드백이 내 도파민이다 이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 예전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다.
내 힘으로 만들어낸 무언가. 석 달 동안 만든 건 뭐였나. 남의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 넣고, 변수명을 바꾸고, 빌드 돌려서 에러 나면 또 고치고. 그걸 누가 쓰는지도 몰랐다. 릴리즈 당일에 고객 반응을 물어봤더니 팀장님도 모른다고 했다. 대행업체가 “시장 반응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는 한 줄. 그것도 내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 팀장님을 통해서, 팀장님도 부서장님을 통해서 들은.
최 이사가 말하는 그 도파민이라는 걸, 나는 전 회사에서 느꼈었다. 새벽에 배포하고 슬랙에 고객 피드백이 올라올 때. 내 PR에 동료가 “이거 깔끔하다”라고 코멘트를 달았을 때. 오픈소스에 올린 코드가 다른 나라 개발자의 프로젝트에 쓰이고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그런 게 있었다.
지금은 없다. 그게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회사에 와서 처음부터 없었는지, 아니면 석 달 동안 조금씩 빠져나간 건지. 아니, 어쩌면 전 회사를 나오면서 두고 온 건지도 모른다.
최 이사가 두 번째 맥주를 따르면서 무슨 말을 했는데 안 들렸다. 술집의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아서인지, 진짜 안 들리는 건지.
사실 뭔가 채워질 거라는 기대로 최 이사를 만난 것 같다. 그랬나? 그랬다. 최 이사는 좋은 친구다. 용기가 부족했던 나에게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던 친구.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다음 날 새벽에 우리 집 앞에 와서 한 시간을 서 있던 친구. 다른 사람들은 그를 대범하다고 하는데, 나는 안다. 그 대범함 뒤에 꽤 감성적인 놈이라는 걸.
그런 친구인데. 오늘 만나면 좀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함께하면 즐거웠던 그 모든 말들이 오늘은 가슴 위에 쌓여만 갔다. 최 이사가 신나면 신날수록 내 안의 빈 곳이 더 선명해졌다.
속이 올라왔다.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반도 안 마신 잔이었는데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
최 이사가 말을 멈추고 나를 봤다. 잠깐 조용해졌다.
“왜? 몸이 안 좋냐?”
“어, 좀.. 피곤해서. 미안.”
거짓말은 아니었다. 피곤한 건 맞다. 석 달째 피곤하다.
최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야 뭐 벌써 가냐 한 잔만 더 해”라고 붙잡았을 텐데, 내 얼굴을 보더니 그러지 않았다. 감성적인 친구니까.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을 것이다.
“그래, 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자.”
일어서며 지갑을 꺼냈는데 최 이사가 손을 저었다.
“내가 낸다. 가라 가.”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2층에서 1층, 겨우 한 층인데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불었다. 술집 안의 따뜻한 공기가 등 뒤에서 잘렸고, 바깥 공기가 쌀쌀하게 볼을 스쳤다. 강남역 방향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토요일 저녁. 다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8시 43분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있었던 건가.
걸었다. 지하철역 방향이 아니었다. 왜 이쪽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발이 멈추지 않았다.
토요일 밤 강남. 사람들이 많았다. 커플이 손을 잡고 지나가고, 단체로 웃으며 걸어가는 무리가 있었다. 다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나만 방향이 없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신호가 바뀌어도 건너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차올랐다. 한 번 더 바뀌었다. 그제야 건넜다.
아까 최 이사가 한 말이 맴돌았다. 내 힘으로 만들어낸 무언가. 소프트웨어의 매직. 그 말 자체가 틀린 게 아니다. 맞는 말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한때는 느꼈으니까.
이직했을 때 기대했던 게 있었다. 큰 회사니까 체계가 있을 거라고, 좋은 개발 문화가 있을 거라고, 내 기술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최 이사가 이직하라고 등을 떠밀었을 때 그래서 용기를 냈다. 열 달이 지났다. 체계는 있었다. 보고 체계. 승인 체계. 결재 체계. 내가 기대했던 체계는 아니었다. 코드 리뷰는 없고, 테스트는 없고, 고객은 보이지 않았다.
최 이사는 밤을 새면서 도파민을 느꼈다. 나는 밤을 새면서 에너지가 빠져나갔다. 같은 야근인데 방향이 달랐다. 그의 끝엔 고객이 있었고, 나의 끝엔 부서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당분간은 최 이사를 만나기 힘들 것 같다.
싫어서가 아니다. 좋은 친구다. 여전히.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그의 열정이 닿는 곳마다 무거워졌다.
가로수 아래 벤치가 보여서 앉았다. 앉으니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웃는 소리, 하이힐 소리, 전화 통화하는 소리. 앉아 있으니 다들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가 바뀌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술집에서는 흐릿하던 것이 여기 앉으니 선명해졌다. 혼자니까. 갈 곳이 없으니까.
주말이 끝나면 월요일이 온다. 수정 요청 대기. 성과급은 언제인지 모른다. 또 같은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 한다. 그리고 또 석 달이 지나겠지. 그때도 나는 누가 쓰는지 모르는 코드를 붙여 넣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최 이사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야 오늘 고마웠다. 몸 챙겨! 내가 보기엔 좀 쉬어야 될 것 같다 ㅋㅋ 조만간 또 만나자 친구야”
읽고 핸드폰을 무릎 위에 엎어 놓았다.
조만간. 그때 만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월요일] 김 대리 - 사무실에서
수정 요청 목록이 왔다.
부서장님이 말했던 대행업체 수정 건이었다. 팀장님이 슬랙에 파일을 공유했다. 엑셀 파일. 열어보니 항목이 스물세 개였다. UI 수정, 텍스트 변경, 필터 기능 추가, 정렬 순서 변경. 한 줄짜리도 있고 하루 이상 걸릴 것도 있었다.
팀장님이 말했다. “일주일이면 될 거야.”
부서장님이 했던 말이 그대로 내려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된다. 크게 어렵지 않다. 석 달 동안 매번 들었던 말이다.
일주일이 지났다. 목록의 절반을 끝냈다. 나머지 절반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기존 코드를 건드려야 하는 것들이 있었고, 건드리면 다른 데서 깨졌다. 테스트가 없으니까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어디서 터지는지 찾아야 했다. 당연히 일주일 안에 끝나지 않았다.
두 주째 되던 날, 새 목록이 왔다. 대행업체에서 고객사 데모를 했는데 추가 요청이 생겼다고 했다. 열네 개 항목. 이전 목록이 아직 안 끝났는데 새 목록이 쌓였다. 팀장님은 별말 없이 슬랙에 파일을 올렸다. “확인 부탁합니다.” 한 줄.
두 주가 한 달이 됐다. 한 달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끝날 때쯤 또 새 목록이 왔다. 이번에는 여덟 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정 건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돌아가며 채워지고 있었다. 하나를 빼면 하나가 들어왔다. 진행률은 항상 60에서 70퍼센트 사이를 맴돌았다. 스프레드시트의 초록색 칸이 늘어나는 만큼 빨간색 칸도 늘어났다. 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월요일이 오면 슬랙을 열었다. 새 메시지가 있었다. 대행업체 담당자가 올린 건. 팀장님이 포워딩한 건. 열어보고, 확인하고, 코드를 열고, 고치고, PR을 올렸다. 화요일도 같았다. 수요일도. 하루가 지나면 다음 하루가 왔고, 그 하루도 같은 하루였다. 달력을 보지 않으면 무슨 요일인지 구분이 안 됐다. 회의도 없고, 일정 변화도 없고, 매일 같은 엑셀 파일을 열어서 같은 항목을 확인했다.
성과급 얘기를 아무도 안 꺼냈다.
처음에는 의식했다. 팀장님한테 성과급 관련해서 업데이트 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닫았다. 하 과장도 안 물었다. 이 과장도. 정 대리도. 프로젝트 끝나고 얼마간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내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달쯤 지나니 그마저도 달라졌다. 피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잊은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성과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수정 요청 확인하고, 코드 고치고, 빌드 돌리고, 슬랙에 완료 보고하고. 그게 하루였다. 그 하루가 반복됐다. 성과급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 단어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먼 일처럼 느껴졌다. 부서장님이 “성과가 있어야 성과급”이라고 했을 때의 그 공기, 에어컨 소리, 팀장님의 굳은 얼굴. 그게 두 달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제 같기도 하고, 일 년 전 같기도 했다.
첫 번째 토요일이었다.
오후에 카페에 갔다. 집 근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개인 노트북이었다. 먼지를 닦고 전원을 켰다. 부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사이에 뭘 만들지 생각했다. 사이드 프로젝트. 뭐든 좋으니까 내 코드를 짜고 싶었다. 남의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설계하고 내가 짜는.
바탕화면이 떴다. VS Code를 열려고 독에서 아이콘을 찾았다. 슬랙 알림이 울렸다. 회사 핸드폰이었다.
팀장님이었다. “김 대리, 지난주 수정 건 중에 필터 관련 이슈 하나 확인 좀 해줄 수 있어? 대행업체에서 급하다고 연락 왔는데.”
토요일이었다. 오후 두 시였다. 카페에 앉아서 뭔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슬랙을 확인하고 관련 코드를 찾아봤다. 필터 로직에 예외 처리가 빠져 있었다. 수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삼십 분이면 됐다. 하지만 로컬에서 테스트하려면 개발 환경을 세팅해야 했고, 개인 노트북에는 환경이 없었다. VPN을 켜고 회사 레포를 클론하고 의존성을 설치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수정하고 PR을 올리고 슬랙에 완료를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VS Code 창이 두 개 열려 있었다. 하나는 회사 코드. 하나는 빈 창. 사이드 프로젝트를 위해 열어둔 건데,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한 줄도 안 쳤다. 얼음이 다 녹아 물처럼 연해진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노트북을 닫았다.
다음 토요일에도 카페에 갔다. 같은 자리. 같은 아메리카노. 노트북을 열고 VS Code를 켰다. 이번에는 뭘 만들지 정해놓고 왔다. 간단한 CLI 도구. 마크다운 파일을 파싱해서 정적 사이트를 만들어주는.
슬랙이 울렸다. 팀장님이었다. “김 대리, 이번 주 수정 목록에서 세 번째 항목 있잖아. 그거 로직이 좀 복잡할 것 같은데 월요일 전에 한번 봐줄 수 있어?”
노트북을 닫았다. 이번에는 코드를 한 줄도 열어보지 않고 닫았다.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지 않고 카페를 나왔다. 밖은 햇볕이 좋았다. 주말 오후의 거리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메고 원룸으로 돌아갔다.
개인 노트북을 가방에 넣은 채 원룸으로 가져와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에 먼지가 얇게 깔려 있었고, 노트북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컵도, 책도, 메모도. 다음에 열어야지. 다음에.
그 다음 주말.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다. 카페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슬랙 알림을 끄고 가자. 핸드폰을 꺼내서 슬랙 알림 설정을 열었다. 손가락이 토글 위에서 멈췄다. 끄면 월요일에 확인 못 한 건이 쌓여 있을 것이다. 팀장님이 직접 전화할 수도 있다. 전화가 오면 더 곤란하다.
알림을 끄지 않았다. 카페에 가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누런 얼룩이 구석에 하나 있었다. 입주할 때부터 있던 건지, 나중에 생긴 건지 모르겠다. 커튼 사이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 절반만 밝혔다. 나머지 절반은 어두웠다.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토요일이었는데 몸이 무거웠다. 슬랙은 울리지 않았다. 울리지 않았는데도 안도감이 들지 않는다. ‘울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에 무겁게 짓눌릴 뿐이었다.
Notion을 열어본 건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Notion 앱을 열었다. 개인 워크스페이스. 사이드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적어두는 페이지가 있었다. 입사하기 전에 만든 건데, 항목이 다섯 개 적혀 있었다.
“실시간 코드 리뷰 도구 — 깃허브 PR 연동, AI 코드 리뷰 자동화” “개발자 커뮤니티 MVP — 기술 블로그 + Q&A 통합” “CLI 기반 정적 사이트 생성기” “오픈소스 모니터링 대시보드” “개인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내가 쓴 건 맞았다. 글씨체도 내 것이고, 정리하는 방식도 내 것이었다. 그런데 낯설었다. 이걸 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AI 코드 리뷰 자동화”라는 문장 옆에 불꽃 이모지가 붙어 있었다. 내가 붙인 거다. 신이 나서 붙였을 것이다. 그때의 감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끄고 삼각김밥 나머지를 먹었다. 밥알이 입안에서 뭉쳐졌다.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점심시간 사람들이 지나갔다. 넥타이를 맨 사람,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 이어폰을 꽂고 걷는 사람. 다들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들 비슷한 얼굴이었다. 내 얼굴도 저렇겠지.
점심시간에 이직 사이트를 열었다. 원티드. 잡코리아. 화면을 스크롤했다.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 풀스택 엔지니어. 연봉 협의. 경력 3년 이상. 기술 스택이 나열되어 있었다. 익숙한 것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원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화면을 닫았다. 다음 날 점심에도 열었다. 같은 사이트, 비슷한 공고. 스크롤하다가 닫았다. 그 다음 날에도. 열었다가, 닫았다. 열었다가, 닫았다.
한 번은 이력서 업데이트 페이지까지 들어갔다. 경력 사항 란에 현 회사를 추가하려고 했다. 주요 업무. 뭐라고 쓰지. “대행업체 기획 기반 소프트웨어 개발.” “기존 코드 기반 수정 및 유지보수.” 적으면서 손이 멈췄다. 이게 내 경력인가. 석 달 동안 한 일을 한 줄로 쓰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저장하지 않고 닫았다.
포트폴리오도 안 만들었다. 열어보는 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면 지금 상태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준비하고 있다는 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뜻이니까.
카톡 알림이 오지 않는 대화방이 하나 있었다.
최 이사. 마지막 메시지는 두 달 전이었다. “야 오늘 고마웠다. 몸 챙겨! 내가 보기엔 좀 쉬어야 될 것 같다 ㅋㅋ 조만간 또 만나자 친구야”
읽음 표시만 떠 있었다. 답장을 안 했다.
안 한 게 아니다. 못 한 거다. 몇 번 대화창을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입력란을 봤다. “응 나도 고마웠어”라고 치다가 지웠다. “요즘 좀 바빠서”라고 치다가 지웠다. 뭐라고 쓸지 모르겠다.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안 좋다고 하면 그 다음 대화를 감당할 수가 없다. 최 이사는 감성적인 친구니까. 걱정할 거다. 만나자고 할 거다. 만나면 또 그 에너지를 감당해야 한다.
대화창을 닫았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고 검은 유리에 형광등 불빛이 비쳤다. 사무실 천장의 형광등. 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 달 전에도, 두 달 전에도, 지금도 같은 소리였다.
두 달이 지났다. 답장은 여전히 안 했다. 대화방을 열 때마다 “조만간 또 만나자 친구야”가 마지막 줄에 있었다. 조만간. 이르든 늦든 그 사이. 하지만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어느 날] 김 대리 - 사무실에서
하 과장이 달라진 건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 과장은 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다. 사무실에서 전화할 때도 그랬고, 옆 자리에 앉아서 코드 리뷰를 할 때도 그랬다. 농담을 자주 했다. “이 변수명 뭐냐 ㅋㅋ firstData가 뭔데 firstData야. 데이터가 첫째라는 건지 첫 번째 데이터라는 건지.” 그러면 정 대리가 웃고, 나도 웃고, 가끔 팀장님도 헤드셋을 벗고 웃었다. 하 과장 덕분에 사무실이 조용하지 않았다.
6시가 되면 하 과장이 가방을 들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퇴근 시간이니까. 프로젝트 기간에는 아무도 6시에 안 갔다. 10시, 새벽. 그게 정상이었다. 수정 작업이 시작되고 나서는 야근이 줄었지만, 그래도 7시나 8시까지는 남아 있었다. 하 과장만 6시에 일어났다.
“수고하세요.”
그게 전부였다. 누구한테라고 할 것도 없이 사무실 전체를 향해 한마디 하고 나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매일이었다. 6시 정각. 모니터를 끄고, 가방을 들고, “수고하세요.” 같은 동작, 같은 말, 같은 시간.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정확했다.
코드 리뷰가 달라졌다. PR을 올리면 하 과장이 리뷰를 달았다. 예전에는 코멘트가 길었다. 변수명 지적, 로직 개선 제안, 가끔은 “이 부분 깔끔하다 ㅎㅎ” 같은 것도 있었다. 지금은 한 줄이었다.
“확인했습니다. 머지해요.”
그게 전부다. 코드를 봤는지 안 봤는지도 모르겠다. 리뷰 시간이 짧았다. PR을 올리고 십 분이면 승인이 떴다. 예전에는 하루 이상 걸리기도 했다. 꼼꼼히 봤으니까. 지금은 빨랐다. 빠른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농담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농담이 사라진 자리를 아무것도 채우지 않았다. 하 과장이 말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업무 관련 대화는 했다. “이 건 내가 할게요.” “이거 확인했어요?” 필요한 말만 했다. 그 사이에 있던 것들이 없어졌다. 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는 것들. 코드 고치다가 “야 이거 누가 짠 거야 대체”라고 웃으면서 말하던 것. 점심시간에 “오늘 뭐 먹을까, 아 어제 그 찌개집 가자”라고 먼저 나서던 것. 슬랙에 팀 채널 말고 잡담 채널에 밈을 올리던 것. 그런 것들이 전부 사라졌는데, 사라진 줄도 모르게 사라졌다. 하 과장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하 과장 모니터 옆에 뭔가가 서 있었다. 작은 피규어였던 것 같다. 캐릭터가 뭔지는 몰랐다. 로봇 같기도 했고,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기도 했다. 입사했을 때 처음 봤고, 매일 거기 있었다. 보기는 했는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냥 하 과장 자리의 일부였다. 모니터가 있고, 키보드가 있고, 머그컵이 있고, 피규어가 있었다. 그게 하 과장 자리였다.
어느 날 그 자리를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모니터 옆, 책상 위, 피규어가 서 있던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책상 표면의 먼지 자국도 없었다. 깨끗하게 닦은 건지, 원래 그랬던 건지. 언제 치웠는지 모르겠다. 어제인지 지난주인지. 매일 보는 자리인데 없어진 걸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게 이상했다.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하 과장의 물건이니까.
하 과장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 과장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회사에서 6년을 버틴 사람이니까 나름의 방식이 있었을 거다. 침묵이라는 방식. 프로젝트 때도 시키면 했고, 의견을 물으면 짧게 답했다. 그런 사람인데 요즘은 “그냥 그래”가 입버릇이 됐다. 점심 뭐 먹을지 물어도, 수정 건 어디까지 했냐고 물어도 똑같았다. 정 대리는 아직 아침에 “안녕하세요” 하고 퇴근할 때 “수고하셨습니다” 했지만, 예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지는 않았다. 2년차가 분위기를 읽은 것이다. 사무실 전체가 조용해졌는데, 그 조용함이 편안한 게 아니라 빠져나간 것들이 남긴 빈자리 같았다.
나는 이 변화들을 봤다. 매일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사람들과 앉아 있으니까 보였다. 하 과장이 6시에 가방을 드는 것. 코드 리뷰가 한 줄로 줄어든 것. 피규어가 사라진 것. 이 과장의 “그냥 그래.” 정 대리의 줄어든 질문.
다 봤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점심시간에 하 과장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둘이서만. 1층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내려가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예전 같으면 하 과장이 먼저 뭔가를 말했을 것이다. “뭐 먹으러 가?” 같은 거. 지금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도 핸드폰을 꺼냈다. 볼 것도 없는데 화면을 켰다. 1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고, 하 과장이 먼저 나가고 나도 뒤따랐다. 같은 방향으로 걸었는데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반 발짝 정도 어긋나 있었다.
편의점에서 각자 뭔가를 사서 각자 계산하고 각자 돌아갔다. 사무실에 올라와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와 모니터 사이 낮은 칸막이가 시야를 갈랐다. 키보드 소리만 낮게 깔렸다.
그게 전부였다.
[두 달 뒤] 김 대리 - 사무실에서
수정 목록은 계속 왔다.
세 번째 목록이 오고, 네 번째가 왔다. 항목 수는 줄었지만 난이도가 올라갔다. 기존 아키텍처로는 감당이 안 되는 요청이 끼어 있었다. API 응답 구조를 바꿔야 하는 건데, 그러면 프론트엔드도 전부 고쳐야 했다. 팀장님이 부서장님한테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지는 모르겠다. 슬랙에는 “확인 부탁합니다”만 올라왔다.
야근이 다시 시작됐다. 석 달 때처럼 매일은 아니었지만, 8시나 9시에 나가는 날이 늘었다. 하 과장만 빼고. 하 과장은 6시에 갔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팀장님도.
어느 날 퇴근길에 핸드폰을 꺼내 습관처럼 이직 사이트를 열었다.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멈췄다. 같은 공고들이었다. 지난주에 본 것과 같은. 지지난주에 본 것과도 같은. 회사 이름만 달랐다. 기술 스택은 비슷했고, 연봉도 비슷했고, “자율적인 문화”라는 문구도 비슷했다.
닫았다. 회사 이름만 다르고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게 지금 내 하루와 닮아 있었다.
어느 날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려다가 멈췄다. 이어폰 안에서 지하철 소음이 먼 데서 들리는 것처럼 작아졌다. 그 안쪽의 고요가 오히려 불편해서 이어폰을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GitHub 잔디는 여전히 하얬다. 마지막 커밋이 열한 달 전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간 건 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홉 달이 열한 달이 됐다. 두 달이 더 지난 거다. 두 달 동안 개인 코드를 한 줄도 안 짰다. 회사 코드는 매일 짰다. 남의 코드를 고치고, 복사하고, 붙여 넣었다.
두 달이 지났다.
벤치에 앉아서 “뭔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두 달 전이다.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
수정 목록은 여전히 오고 있었다. 성과급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 과장은 6시에 갔다. 이 과장은 “그냥 그래”라고 했다. 나는 점심시간에 이직 사이트를 열었다가 닫았다. 최 이사한테 답장을 하지 않았다. 노트북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Notion의 불꽃 이모지는 그대로였다.
사무실 창 너머로 판교의 건물들이 보였다. 비슷비슷한 높이, 비슷비슷한 색. 저 건물 안에서도 누군가는 수정 목록을 받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6시에 가방을 들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직 사이트를 열었다가 닫고 있을 것이다.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같은 소리. 석 달 전부터 계속 같은 소리.
바뀐 게 있다면 하나.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