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법원을 방문했다. 지난번에는 영상 재판으로 진행하다 보니 로펌 사무실에서 줌 같은 프로그램으로 선고를 받고 끝났는데, 이번에는 직접 법원을 방문했다. 지난번보다 살이 좀 더 빠졌는지 급하게 구매했던 양복 재킷이 넉넉해졌다. 괜히 기분이 좋다.
약속된 시간 한 시간 전에 법원 앞 스타벅스에서 앉아 있다가 급하게 샌드위치를 하나 먹고 20분 전쯤에 나왔는데 초행길이라 그런지,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5분 거리를 가는데도 초조함에 멀게만 느껴졌다. 법정 앞에서 안내를 받고 재판 일정을 보는데, 정말 많은 회사의 사건 일정들이 일정표에 나와 있었다.
5분에도 2, 3건씩 사건이 있는 일정을 보면서 그 모든 사람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각자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털어낸다는 홀가분함도 있겠지만 마냥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안내받은 대로 법정 중간에 앉았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공간이었고, 미디어에서 보는 것처럼 판사 세 명이 앉아서 무미건조하게 변호사의 보고를 듣고 몇 가지 말을 던지는 게 다였다. 채권자들은 대부분 참석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차례가 되어 드디어 앞으로 옮겨 앉았다. 파산관재인(변호사)이 보고서를 읽고 판사가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에 따라 답변했고 (무슨 질문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되게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경위서도 여러 번을 고쳐 썼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가 시작되니 마음이 힘들어진다.
그렇게 내 20대가, 치열했던 그 시기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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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일 모두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
대답을 안 하기를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상대방도 정말 짜증이 날 법하다. 내가 상대방이었으면 내 말 무시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몇 번의 전화를 했다가 끊기를 반복했다.
프로젝트 마무리를 앞두고 주말에도 열심히 각자 자리에서 대응 중인 팀원들이 있었고 나도 집에서 계속 회사 일을 보고 있었는데 모든 팀원이 주말에 나와서 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1시간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내가 어디서부터 뭘 놓쳤기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맥락 없는 요구를 감정적으로 하는 상대방에 대한 원망, 그리고 팀원들에게 이 상황을 얘기해야 하는 막막함, 그리고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감사하게도 다음 날 거의 모든 인원이 나와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에게도 아물지 않는 큰 생채기가 생겼다. 이 한번 만의 사건 때문은 아니다. 쌓이고 쌓였던 것이리라.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지금 이 시점에 그 부분이 계속 나를 괴롭게 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걸 서슴지 않을 정도로 바닥을 찍었고 그 과정에서 결국 스스로에 대한 후회만 가득하다. 내가 느낀 무력감이 결국은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미리 압축해서 보여준 걸까. 남 탓을 하지 않는다. 그 모든 걸 내 숙제로 내가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로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도망쳐봐야 더 괴로워질걸 나는 그간의 짧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 마음이 힘든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인생은 블랙 코미디와 같아서 나는 블랙 코미디를 좋아한다. 그리고 군상극을 좋아한다.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모두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모두가 주인공이 아니기도 한 그런 이야기를. 모두가 열심히 하려고 해서, 모두가 실수해서, 모두가 각자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이 블랙 코미디에는 빌런이 없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모든 게 다 회색 지대다. 우리는 그걸 구분하고 단순화하고 선명하게 하고 싶지만, 그저 흐릿한 일의 연속이라 때론 뭐가 맞고 뭐가 틀리는지도 모르겠는 일의 연속이다.
꾹 참고 군 생활을 버티며 드디어 전역이라는 빛(끝)을 보지만, 그건 그저 앞에 놓인 거대한 인생에서 시작에 불과하다. 전역하면 그저 경제력 없는 대학생인 것이다. 그래서 그 어느 순간, 어느 시간이라도 삶을 그저 참고 버티지만 말아야 한다. 그 순간을 어떻게 보낼지, 그 순간의 일, 그 순간에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충실하게 보낼지 고민해야 한다.
프로젝트 마무리를 하고 (마음속으로는) 해피엔딩을 바랐지만 결국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인간이 정해놓은 어떤 얄팍한 시기 따위 시간은 알 바 아니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맞이해야 하는 어려움이 또 금방 닥쳐온다. 외면하고 있던 어른들의 사정이 있을 뿐. 심지어는 그냥 프로젝트로 정신없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려운 일을 버텨내면 쉬워지는 게 아니라 더 어려운 일이 다가올 뿐이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고, 닥쳐올 어려움이 현실화가 되니 그걸 핑계로 더욱더 도망가고 싶다.
아직은 도망가지 않은(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 자신에 대한 리스펙으로 어느 순간 대담한 결정을 했던 과거의 나를 부러워했듯,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를 부러워할 만한 모습이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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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좋아해요?“
”글쎄요, 사람들은 좋아해요.“
>”그럼, 일은요?“
“.. (중략) .. 문제들 터지는 것도 싫고요. 오븐이 고장 난다거나 하수관이 막힌다거나 배송 업체에서 양파를 깜빡하는 그런거요.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은 좋아해요.”
*더 베어 시즌3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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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업을 할 때도 그랬고, 현재 팀에서도 그렇고 리더로 팀을 운영하면서 팀원들에게 드는 내 감정은 감사함과 존경, 책임감 그리고 그 뒤에 서운함이 있다. 고독한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내 선택에 대해 자기 연민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러한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주는 욕심이 일어난다. 커리어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조언이나 충고를 받은 적도 없고 좋은 멘토를 만나본 적 없는 외로운 길이라 그걸 내가 줌으로써 충족하려고 했던 것도 같다. 어른(?)들은 나를 금쪽이로 여겼고 한때는 나도 그들을 우습게 여겼다.
그 와중에 내 사람, 내 팀, 내 책임이라는 것에 스스로 얼마나 동기부여가 되고 있는지를 항상 발견했었던 것 같다. 아래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 쿨한 윗사람이 되고 싶은데 결국 스스로 선을 그어보아도 한없이 서운해지고 외로워지는 자신의 못난 성격 탓에 그 모든 결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리더십으로는 재능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자기 의심으로도 이어진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고 존중해줬으면 하고 내가 하는 일과 결정에 대한 의도를 힘들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 줬으면 하는 그런 게으른 마음도 동시에 든다. 1대1이 힘들어지는 사람 수가 되었다. 당연히 모두와 친구가 되는 건 말도 안 되고. 하지만 한 명 이상의 친구가 있었음은 한다. 여기에서 인연으로 끝나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런 욕심이 든다.
이 어려운 길에서 결국 내 솔직한 동기부여는 결국 사람들이다. 제품도, 고객도, 비지니스도 모두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이걸 버티고 있는 건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론 혼자 그냥 토라져서 시니컬해지고 사람들이고 뭐고 다 싫고 내 생각만 하고 싶을 때가 많다. 참 못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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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가 끝나면, 멋진 회고가 담긴 글을 써보려 했다. 7월이 지난 8월 초에만 해도 그런 마음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간을 상상하며 마무리를 한번 제대로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이상한 내용의 일기를 쓰게 되었다.
회고보다 현재의 생각과 두 달 사이에 있었던 단상들로 정리해 보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뭘 더 잘해야 하고 뭐가 아쉬웠고 매번 액션 아이템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부럽다. 난 감상에 쉽게 젖는 사람이라 바로 그렇게 모드 전환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난 기억력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내 얘기 하는 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정말 힘든 일은 가끔 묻어놓고 몇 년 동안 얘기하지도, 추억 삼아 꺼내지도 않는 사람이라 나 자신도 잊어버릴까, 장면들과 생각들을 기록해 놓는다. 그냥 이 글은 회고라기 보다는 자기 위로에 가깝다.
액션 아이템은 당연히 있다. 그 어떠한 상황에도 내 삶의 중요한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서운해하더라도 여전히 기대하고 그 마음을 포기하지 말자. 내 감정이 바닥을 찍더라도 너무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그러면 항상 후회하니까) 항상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당연히 ‘뭘 더 어떻게 내가 잘해야 하나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런 부분이 불쑥불쑥 엄습해 오면서 힘들어진다고 해도 겉으로는 그래도 괜찮은 척이라도 하려고 한다. (음 이게 액션 아이템이군.)
누군가는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겠지만, 나도 뭐 노력을 안했다라기보단 조금 얼떨결에 여기까지 온 것도 같다. 그리고 이렇게 팀원들과 같이하는 순간들이 꿈만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그리고 그 순간이 이어져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팀을 모아서 잃었던 경험을 한 사람의 조바심이기도 하다.) 당장 또 닥쳐올 일들에 마음이 무겁지만 삶은 또 계속된다. 사실 모든 게 시간이 지난다고 다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도 남고 후회도 남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간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에도 일단은 최선을 다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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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부터 파산 절차를 진행했고, 길고 길었던 내 첫 회사를 마무리했다. (지나고보니 10년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준비했다. ”결국 다시 하실거잖아요?“ 라고 했던 변호사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음, 그런가? 솔직히 지금은 좀 자신이 없다. 빨간약을 먹어버린 것이다. 그 사이 낭만도 죽고 현실주의자가 되었으며 겁도 많이 생겼다. 월급이라는 마약은 정말 중독적이다. 그래도 그 불씨가 아예 꺼지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다. 완전히 파산 종결이 되고 나서 투데잇에서 있었던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던 일들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주절주절 칭얼칭얼 말이 너무 길었다.
감상에 그만 젖고 이제 다시 Let’s hi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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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까지 170km야, There's 106 miles to Chicago,
> 기름은 만땅이고, we've got a full tank of gas,
> 담배도 반 갑 남았지, half a pack of cigarettes,
> 날은 저물었고, 우린 선글라스를 썼지.it's dark out, and we're wearing sunglasses.
>
> 가보자고. hit it.
*블루스 브라더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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