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8월 이후로 회고를 전혀 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9월부터 3월까지 반년 이상이 지나갔다. 목표도, 회고도 없이 흘러간 시간이 장담컨대, 근 몇 년간 최악의 시간이리라. 여름까지 만들었던 건강도 망가지고 정신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이제 한번 삶을 괴롭히고 좀먹던 문제들을 깨끗하게 초기화하고 가기로 결정한 지금, 이제는 좀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회고라고 보기엔 어렵고, 매달 하던 기록에 못 미치지만, 매년 하던 기록에 비하면 그 주기가 짧으니 그 이유를 위안 삼아 그저 두서없이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 결혼 생활
9월은 회사에서 B2G 사업이 일단락되는 시즌이었다. 지나고 보니 여름이 더운지도 모르고 일했던 그 시절이었는데, 그저 당시에는 끝났다는 안도감에 잠깐의 휴식을 가지고 싶었다. 9월 추석 연휴에 양가에 양해(?)를 구하고 우리 부부는 스위스, 프랑스로 여행을 다녀왔고 이를 통해 지난 회사에서 불태웠던 긴 시간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신혼이었던 24년 상반기, 반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나는 결혼 생활보다 회사 생활이 삶의 전부였고, 그 기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던 우리 부부의 그 시간은 단순히 유럽 여행 한 번으로 회복되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사실 이때부터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그저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냥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 그런 건데 라는 생각만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 시간을 회복하는 데는 똑같이 6개월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회복을 하는 방향이라는 것,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아내의 다짐과 마음가짐 그리고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은 우리 둘에게 굉장히 고통스러웠지만.
### 회사
B2G 사업은 아무리 의미 부여를 해도 내게는 그저 외주 사업에 불과했다. 정부에서 제시한 통과 가이드라인이 있었고, 그 또한 모호해서 이걸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어떻게 여기서 더 점수를 따서 만들어내느냐에 집중했다. 그 과정에 고객도 사용자도 없었고 그저 여기에서 이걸 엉성한 상태에서 급하게 정책을 밀고 나가겠다는 정부와 어떻게든 그 리그에 합격하기를 위한 기성 시장의 플레이어들만이 존재했다. 우리도 그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무조건 기성 시장의 플레이어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모호한 가이드라인, 기성 시장 플레이어들의 이해가 가지 않는 요구사항에서 줄다리기하면서 프로덕트 개발을 마무리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4년 5월이었지만, 사실 23년 9월부터 여기에 많은 걸 쏟고 있었고 현재 25년 4월 이 시점까지, 거의 1년 6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해당 프로젝트에 팀은 물론 나 또한 많은 리소스를 쏟았다.
스타트업은 외주 사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낭만을 추구하려는 게 아니다. 사업은 현실이니까. 그게 스타트업이니 뭐니 다 떠나서 말이다. 그래서 인하우스 프로덕트의 침체기에 외주 사업에 손을 대는 건 돈 없는 스타트업에게는 당연한 수순이다. 예전에 당시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님이(지금은 퇴사하신 듯) 식사 자리에서 넥슨 초창기 바람의 나라 개발 썰을 들려주면서 그때도 자기 빼고 다른 직원들은 홈페이지 외주를 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사업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만약 이게 단순히 외주 사업이었다면 외주 개발이 착수될 때 착수금이 들어와야 하고 그리고 마무리될 때 잔금이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이것이 인하우스 프로덕트 개발이었으면 당장의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이해관계자 몇 명의 요구사항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라면 진짜 빨리 해치워버리고 정산받고 빠지는 게 인하우스 프로덕트를 가지고 있는 스타트업에게는 최선이다.
우리는 여기에 1년 반의 시간을 썼다. 이게 B2G 사업이다 보니, 단순히 외주 사업보다 훨씬 난이도가 있었지만 우리는 모든 요구사항을 충족했고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착수금도 잔금도 없었다. 그저 B2G 사업의 통과는 우리에게 이 시장에 진입하여 해당 제품을 세일즈하는 조건을 부여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그 통과 기준이 전혀 시장의 요구사항을 반영하지 않고 있어, 우리가 영업을 하려면 다시 제대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 산더미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비롯해 안 그래도 불안했던 정책 여론이 더 강화되며 사실 25년도에는 약간의 리턴을 기대했던 그 기대마저도 완전히 날아가게 되었다.
스타트업은 사실 Plan B를 고려할 수 없다. 항상 Plan A만 바라보고 미친듯이 달려들기 때문에 희박하나 그 성공이 다가왔을 때 그 누구보다 빠르게, 크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업적 결과를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건 너무 쉽다. 그 시점에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결국 위기가 다가오면 더 줄이고 줄이면서 다음을 도모하고 버텨야 하는 것이다. 스타트업의 관점에서 이러한 판단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걸 같이 하는 임직원들은 꽤 괴롭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결정들이 잘못된 결정들이 되고 잘못된 결정들이 곧 임직원들의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금전적인 부분이든, 정신적인 부분이든. 이 과정을 함께하고 싶지 않다면 임직원 입장에서는 빠르게 떠나는 것이 정답이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럴 자격은 없다. 다만, 이러한 결정이 모두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고, 지금 현재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공유해주어야 한다. 그게 소통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경영진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임직원들이 각자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가던가, 남던가. 그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다. 갈 사람은 서로의 앞길을 잘되길 빌어주고, 남은 사람들은 합심하여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회사도 그걸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소통의 부재는 이 모든 기회를 박탈시킨다. 임직원에게도, 회사에게도 그렇다. 특히, 답을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권한도, 답변도 할 수 없는 중간 관리자의 입장은 정말 난감하기만 하다. 무기력하고, 무력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내가 무얼 더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이런 내 입장을 모르는 팀원들도, 경영진도 전부 싫었다. 에둘러서든 끼리끼리든 그들끼리 하던 말들이 내게 들리는 순간,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들도 나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을 수 있지만, 전부 나에 대한 비난으로 들렸다. 회사 전체의 문제와 책임을, 마치 다 내 문제와 책임으로 느끼고 감당하려고 했던 것 같다. 리더라는 자리는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어떠하든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것.
그런데 아무런 정보도 권한도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한계가 왔다. 모든 사업적 판단이 앞단에서 일어나고 끌려가듯 시키는 거, 놓여진 것만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 또 반복되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개선하겠다. 소통하겠다. 는 없다. 그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향해 그냥 앞으로만 다시 가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못해서 우리 부서만 그런 건가 했었다. 그래서 우리 부서만 계속 외딴섬인가 했는데, 다시 돌아보니 모든 부서가 외딴섬이다. 오히려 내가 가진 정보가 그나마 빨랐던 거다. 이게 더 이상 개선되기 힘들다는 걸 내가 깨달은 순간, 그리고 나랑 함께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회사에게도, 이제는 나에게도 더 이상 기대가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만하기로 하였다.
### 월별 회사 요약
- **9월**
- 프로젝트 제출 완료. 당시에만 해도 회사에서 인하우스 프로덕트에 다시 집중하자고 해서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B2G 프로덕트를 정리하고 인하우스 프로덕트의 목적 조직, 스쿼드 형태로 운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10월**
- 갑자기 글로벌 사업 프로젝트가 시작된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외면했고 B2G 프로덕트의 심사 후 후속 수정보완 기간이라 거기에 집중했다. 그냥 빨리 끝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 **11월**
- B2G 프로덕트의 심사 합격이 났다. 이게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의 개수로 하다 보니 불합격 난 콘텐츠도 있었지만, 그래도 과반 이상은 합격이 났다.
- 이때, 인하우스 프로덕트 스쿼드로 빠르게 조직을 재편하고 과제 기획 및 개발을 진행하였다.
- 이 시기도 쉽지는 않았지만 인하우스 프로덕트 과제 기획 개발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재미는 있었다.
- **12월**
- B2G 프로덕트를 다시 개발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11월에 불합격 콘텐츠에 대한 재심사 제출 일정이 있다고 전달받았고, 새로운 파트너도 있었다. 매번 그렇지만 추가 개발은 없다고 전달받았지만 역시 까보니 지난 상반기 못지않은 요구사항이 쏟아져 있었고 결국은 인하우스 프로덕트 스쿼드의 1차 과제가 마무리되면서 어쩔 수 없이 또 B2G 프로덕트 과제를 끌고 왔다.
- **1월**
- 스쿼드는 인하우스 프로덕트 기준으로 가고 있었지만, 결국 B2G 프로덕트를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대책이 필요했다. 팀장들과 회고를 통해 바쁘다는 핑계로 놓치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시 사업 단위(글로벌, B2G, 인하우스신규)로 스쿼드를 재편하고 팀원들에게 직급도 부여했다. 회사가 어떻든 내 개인기로 최대한 살려보고자 했던 것 같다.
- **2월**
- 새로운 스쿼드 체제로 기민하게 움직이나 했으나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본질은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맥락이 다른 세 가지 스쿼드를 누구에게도 제대로 위임하지 못했고 결국 어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 **3월**
-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알고 보니 떠났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사람들이 나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 시작할 때가 그나마 나은 타이밍이었는데, 그마저도 늦어버렸다. 알량한 책임감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기회비용을 고려했을 때, 결국 지금이라도 떠나는 결정이 맞다고 생각했고, 지금 시점에서는 확신이 생겼다.
회사 얘기는 여기서 그만 줄이겠다. 회사 전체에 대한 회고는 다른 글로 남기겠다. 최근 6개월이 힘들었다고 모든 기억이 나빴던 건 절대로 아니다.
### 개인 (건강, 독서, 기타)
마음이 어둡다 보니 루틴이 많이 무너졌고, 중간중간 그런 마음을 풀고자 무리하게 운동을 시도했던 결과, 부상이 따라왔다. 부상이 있으니 운동 가는 것이 힘들어졌고 아직도 부상 회복 중인 상태다. 멘탈이 안 좋을 때라 운동을 못하니 결국 또 스트레스 해소가 음식 섭취로 이어졌고,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져 가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서야 병원 치료도 꾸준히 받고 재활 운동도 계속하고 있다.
내가 가장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증상이 독서다. 6개월간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책을 놓은 적이 없는데, 책을 그냥 아예 놓았다. Input이 없으면 소진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진되고 있었나 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부부는 잠깐 어려운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행이었다. 프랑스, 스위스뿐만 아니라 세부, 오사카, 교토 시간이 허락된다면 최대한 멀리 떠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물론 한창 싸우던 시기라 힘들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결국 잘 다녀온 것 같다. 많이 도움이 되었던 시간들이다. 여전히 유명한 관광지를 들린 기억보다 둘이서 두런두런 얘기하며 평범한 거리를 걸었던 그 순간순간들이 떠오른다.
## 나가며
이 글은 회고도,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도 아니다. 회고라고 하기엔 너무 생각의 나열이고, 기록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생각의 나열이다.
내 어려움은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동의받고자 쓰는 글도 아니다. 그저 이러한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어쩌면 용기가 충만해야만 할 수 있었던 다음의 선택을 과감히 내렸고, 결국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이 되었는데 - 어떻게 뒷걸음을 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인생은 항상 쉬운 결정과 어려운 결정을 쥐어주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래서 가혹하다. 그런데 항상 정답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새로운 선택이 더 어려운 길이라 나는 선택했다. 회사가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 여기 있는 게 나한테 더 쉬운 결정이다. 물러나면 또 후회할 것 같아서, 그냥 뒷걸음질 친 김에 새로운 길로 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남에게 어려운 길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이 있을 뿐.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지난 4년간 회사 생활에 대한 회고는 다른 글에서 남기도록 하겠다.
>All that is gold does not glitter
>금이라고 다 반짝이진 않으며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The old that is strong does not wither
>오래되더라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Deep roots are not reached by the frost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미치지 못한다
>From the ashes a fire shall be woken
>잿더미 속에서 불꽃이 깨어날 것이고
>A light from the shadows shall spring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날 것이다
>Renewed shall be blade that was broken
>부러진 칼날은 다시 벼려지고
>The crownless again shall be king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
⁃ J.R.R. 톨킨, 반지의 제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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